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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lking About  :  [출간서적 맛보기] 본국검법 1부 -사라진 기억-
  Name  :  안병도     * Go 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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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국검법 1부 서문

환타지 소설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드래곤과 기사, 마법사가 나오는 서양 중세 분위기의 소설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만이 환타지 소설일까요? 그 외에 다른 분위기의 환타지 소설이란 변형이나 파생 소설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요?
저는 단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환타지 소설이란 자유로운 상상을 바탕으로 한 모든 소설이며 제대로 만들어진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반지전쟁’이나 'D&D'로 대표되는 서양분위기의 환타지가 아니라도 충분히 정통이나 주류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본국검법은 아주 독특한 환타지 소설입니다. 저는 이 소설을 쓰면서 동양적 환타지라는 장르 규명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적 환타지도 무협도 아닌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썼기 때문입니다. 실제 역사인 일본 전국시대에서 빌려온 가상세계를 바탕으로 중국과 조선, 유럽을 넣은 독특한 세계관은 본국검법의 가장 큰 독창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본국검법이란 신라시대부터 전해오는 무예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검법입니다. 이 글을 쓰게된 직접적 동기는 바로 이 ‘본국검법’이란 키워드에 있습니다.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신라는 왜국(倭國)에 이웃하고 있으므로 그 춤추는 칼들이 반드시 전해졌을 것이나 상고할 수 없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즉 본국검법이 일본에 전해졌을 가능성을 강력하게 나타낸 것이지요. 그러나 일본의 검술사는 삼국시대는 물론 모든 중국과 조선으로부터의 검술 유입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있을 듯 한데도 증명되지 않은 그 역사적 사실을 내가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구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실제 역사 위에 내가 만든 가상의 역사와 설정을 얹었으며 여러 가지 환상적 요소들을 결합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 글을 읽으며 하나의 ‘가능성’을 보아주길 바랍니다. 서양 중세 분위기가 아니라도, 혹은 중원으로 대표되는 무협 분위기가 아니라도 충분히 재미있고 좋은 ‘동양적 환타지’가 나올 수 있다는 가능성입니다. 그 가능성과 함께 ‘재미있었다’ 라는 한마디가 나올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이 책이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2002년 2월 안병도


                    본국검법 (本國劍法)
                     - 사라진 기억 -

우리 나라의 진정한 검법은 거의 실전(失傳)되었다. 지금 남아있는 검법은 모두 원래의 검법 중 껍데기와 가장 하수(下手)의 기술만이 남아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우리는 우리의 가장 뛰어난 고유의 검법을 무시한 채로 중국의 것만을 숭상하고 배워왔다. 그러한 우리들은 알지 못한다. 진정한 우리의 검법이자 최강의 검법인 본국검법(本國劍法)을...

                 제 1 화  꽃을 자르는 새

나는 누가 왜 이러한 난세(亂世)를 만들었냐고 묻지 않는다. 다만 나에게 주어진 한 자루의 검으로 나의 길을 막는 모든 것을 가르고 나갈 뿐이다.
                                    - 하나기리 도리 (花切り鳥)

                           - 1 -
빛나는 삼각자세, 무섭게 빛나는 눈, 그리고 여자보다도 더 아름다운 외모...
현 일본국(日本國) 최고 검술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인물이 있었다. 단 스물 일곱의 나이에 스스로 풍신일도류(風神一刀流)라는 일파를 만들어낼 만큼 검술에 뛰어나고 늘 붉은 기가 도는 하얀 옷을 입고 다니는데 그 붉은 기는 사실 물들인 것이 아니고 그가 죽인 사람들에게서 튄 피가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냉혹함과 비정함의 화신처럼 일컬어지고 있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봄이 와서 벚꽃이 떨어지면 늘 그는 춤을 추었다. 붉은 기가 도는 흰색 옷을 펄럭이며 환하게 떨어지는 꽃잎 속에서 그는 잘 때에도 놓지 않는다는 애검(愛劍) 미즈류(水龍)를 들고 탐스러운 긴 흑발을 휘날리며 한참동안 춤을 추었다. 창백해 보일 정도로 새하얀 얼굴에 붉은 입술...
그는 여자보다도 더 아름다운 미모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때문에 그의 춤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 마치 천상의 선녀(仙女)가 춘다는 춤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지만, 춤이 끝난 후 땅에 떨어진 벚꽃들이 모두 정확히 두 동강 나있음을 보고는 경악했다.
사람들은 그를 '꽃을 자른다'는 의미의 하나기리(花切り)라고 불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이름 외에 더 이상의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그는 오로지 ‘삼검신(三劍神) 하나기리’ 일 뿐이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천둥이 온 땅을 흔들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에치젠(越前)의 해변에 지금 두 남자가 서있었다. 한쪽은 매우 남루한데다 빛 바랜 푸른색 옷을 입고 있는, 이리저리 얼굴이 일그러진 매우 험상궂은 표정의 남자였다. 그는 오른 손에 사슬이 달린 번쩍이는 낫을 들고 있었다.
“네가... 네가 감히 내 부하를 모두 죽였겠다! 내 충실한 부하들을!"
말하는 동안에도 그는 분노와 증오로 인해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 그의 손에 들린 낫이 가끔씩 번쩍이는 번개에 비추어 소름끼치도록 요사스럽게 빛났다. ‘사슬낫’ 이라 불리는 그것은 보통 농민들이 쓰는 농기구용 낫과는 달리 마치 검(劍)처럼 예리한 날을 가지고 있는 데다 자루에 묵직한 쇠사슬까지 달려 있었다. 찌르고 베는 것 이외에 던지고 휘두르는 등, 온갖 공격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정식 검을 가지지 못한 하류층의 도적이나 닌자 사이에 널리 쓰이고 있는 무기였다.
“그 녀석들은... 아니, 네놈들 노부시(野武士)들은 모두 죽어도 마땅한 쓰레기들이다."
다른 한쪽의 대답하는 사람... 긴 흑발을 바람에 출렁이고 있는 남자는 무섭도록 감정이 절제된 어조로 차갑게 말했다. 그는 아예 상대는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돌린 채 미친 듯이 출렁이고 있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기가 도는 흰옷에 마치 꽤뚫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 여자인가 하고 착각할 정도의 미모.
“하나기리! 감히 부하들뿐만 아니라 나 기노시타(木下)님까지 모욕하다니! 큐슈(九州)에서 그렇게 입을 놀린 녀석은 누구도 살아 남지 못했다. 설사 성내무사(城內武士)라도 말이다!”
사슬낫이 조금씩 떨리며 쩔렁쩔렁하는 소리를 냈다. 기노시타라 말한 그 남자는 하나기리의 말에 상당히 흥분하고 있는 듯했다.
“지옥에 가서도 후회하게 해주마!"
사슬낫을 든 기노시타는 괴상한 고함소리와 함께 하나기리에게 낫을 날렸다. 비록 이성을 잃고 흥분하고 있는 상태이긴 해도 후욱 하고 내리는 빗방울을 몰고 날카롭게 날아가는 낫은 정확히 하나기리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무시하는 듯 기노시타를 쳐다보고 있지 않은 하나기리의 목을 금방이라도 두 동강 내 버릴 것처럼.
“목숨을 아끼지 않은 놈이군.”
그러나 하나기리는 기노시타가 낫을 날리는 순간,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고개를 돌렸다. 날카로운 눈빛에 강한 살기가 불꽃처럼 튀었고 그의 손은 바람같이 왼쪽에 차고 있는 검의 손잡이로 향했다. 그 다음 하나기리의 몸은 방금 사슬낫을 날린 기노시타를 향해 정면으로 달려들어갔다. 그리고...
“핫!"
기노시타의 몸을 지나치며 하나기리는 짧은 기합과 함께 몸을 숙였다. 번쩍 하는 짧은 섬광과 번개가 빛났다.
“앗! 으... 으윽!"
그리고 모든 것은 끝나 있었다. 실로 너무도 순간의 일이었다. 기노시타가 낫을 날리고 그 낫이 아직 공중에 떠있는 동안 하나기리는 오히려 그를 스쳐 지나가며 재빨리 몸을 숙여 사슬낫을 피했다. 그리고는 재빨리 검을 빼내어 기노시타의 허리 부분을 정확히 둘로 갈라버린 것이다.
“풍신일도류 제일식(第一式), 미풍산화(微風散花)..."
들릴 듯 말 듯 나직이 속삭이는 하나기리의 말을 들으며 기노시타의 몸은 천천히 피를 뿜으며 허물어져 갔다. 이어서 핏방울조차 거의 묻지 않은 하나기리의 검이 가벼운 금속음을 내며 검집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일명 ‘죽음의 선고(宣告)’ 라고 불리는 하나기리의 풍신일도류 검술이었다.
“규슈(九州)제일의 실력이라고 떠들더니 그 실력은 고작 불쌍한 농민을 약탈하고 살육할 때만 나타나는 것인가. 역시 쓰레기 같은 녀석이야, 네놈들은...”
하나기리는 둘로 갈라져 피범벅이 되어있는 기노시타의 시체는 쳐다보지도 않고 다시 바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람을 벤 것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가책도 없는, 마치 해로운 벌레 한 마리를 죽인 정도의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말의 차가움과는 달리 뭔가에 대한 그리움이 깃들어 있었다.
“폭풍우가 치는 에치젠의 바다라... 이 녀석은 오늘 또 하나의 죽음을 보려고 이렇듯 요란히 요동친 건가?"
감정이 메마른 어조의 혼잣말과 함께 하나기리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비에 젖은 옷에서는 물이 떨어졌고 비바람과 천둥이 계속 몰아쳤지만 그 모든 것을 그는 느끼지 못하는 듯 태연히 걷고 있었다. 그때였다.
“응?”
그의 눈에 약간 떨어진 해변에 있는 부서진 나무토막과 천 조각이 보였다. 그리고 그 속에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무언가도...
“아!"
하나기리는 그곳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갈수록 그것이 확실히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도 열 일곱 내지 여덟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다만 입고 있는 복장은 일본의 그것이 아니었다.
“이건... 조선국(朝鮮國)?"
흰색 무명으로 된 조선옷이었다. 그 옷을 입은 소년이 정신을 잃고 있었다.
하나기리는 황급히 다가가 소년의 코에 손을 대어 보았다. 숨은 이미 멎어 있었다. 하지만 떠밀려 온지 그다지 오래 되지는 않은 듯 얼굴에는 아직 핏기가 있었다. 어둠 속이라 정확히 볼 수는 없었지만 분명했다.
‘죽은 건가?'
하나기리는 확인을 위해 소년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보통사람은 느끼지 못하는, 아주 희미한 심장고동이 느껴졌다. 그것은 검술을 배워 손끝의 감각이 극도로 예민한 하나기리 같은 검술가 만이 감지할 수 있는 진동이었다. 소년은 아직 살아 있었던 것이다.
‘살릴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과 함께 하나기리는 잠시 멈칫했다. 그는 여태까지 어느 누구도 구해주거나 치료해주지 않았다. 철저히 냉혹하고 비정한 검객. 그것이 바로 여태까지의 그였다.
하나기리는 소년의 가슴에 올려놓은 손을 살며시 거두었다. 어디서 온 지도, 목적이 뭔지도 모르고 더구나 일본인도 아닌 조선인이다. 살린다 해도 그건 하나기리에게 방해가 될 뿐 도움은 되지 않을 것이다.
숨을 멈춘 사람의 조치는 일각이 급하다 일컬어 질만큼 중요하다. 자칫 조금의 차이가 그 사람의 목숨을 생과 사의 경계로 갈라놓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기리는 지금 그런 처지의 소년을 앞에 두고는 서서히 일어서 고개를 돌리려 하고 있었다.
“나는... 하나기리(花切り)다."
그는 천천히 소년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런데 다음 순간 다시 번쩍하고 비친 번개에 드러난 소년의 얼굴이 보였다. 몸은 온통 물에 젖어 있었고 이제 금방이라도 목숨이 사라질 처지였지만 그 얼굴은 꿈을 꾸듯이 평온했다. 마치 어린아이와도 같이...
‘죽어가면서도...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이 소년은...’
다음순간 하나기리는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소년의 몸을 안고는 판자와 천 조각 속에서 꺼냈다.
“그러나 나에게는... 다른 이름도 있다..."
그는 뜻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도리(鳥). 이것이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나의 이름."
그는 어느새 소년에게 구급법(救急法)을 실시하고 있었다. 번개가 한번 더 번쩍 하고 빛나는 가운데 그토록 요란하게 불던 폭풍이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소년은 눈을 떴다. 머리가 아파왔고 또한 온몸에서 강한 통증이 번져왔다. 그러나 참을 수 없는 것은 아니었고 짠 바닷물로 인해 아린 눈도 드디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
“너의 이름은...?"
그 목소리는 왠지 매우 자상하고 부드럽게 들렸다. 소년은 마치 옛날에 듣던 어머니의 목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편안한, 따뜻한 느낌이 몸 전체로 번져 왔다.
“나, 나의 이름은... 준. 그리고 성은... 앗!”
다음 순간 소년은 자신의 눈에 비친 사람의 모습을 확실히 볼 수 있었다. 긴 흑발과 흰 일본식 무사복, 그리고 매혹적일 정도로 예쁜 남자 얼굴...
“너, 넌 누구야!"
준은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오른쪽 옆을 더듬었다. 뭔가를 찾는, 마치 검을 찾는 듯한 동작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손은 헛되이 바닥을 쓸었을 뿐 아무 것도 잡히는 것은 없었다.
순간 준은 자신이 지금 옅은 등잔불이 비치는, 다다미가 깔려진 방안에 있음을 알았다. 더구나 옆구리에 칼을 품은 채로 정좌하고 앉아있는 어떤 사무라이와 함께였다. 그럼... 그가 방금 그 말할 수 없이 편안하게 들린 목소리를 낸 사람? 준은 놀라서 잔뜩 겁을 먹은 표정이 되었다.
“준이라고 했나... 놀라지 말고 앉아!"
좀 서툰, 그러나 의미는 분명히 전달되는 조선어(朝鮮語)가 그 남자에게서 흘러나왔다. 어색하기는 했지만 상당히 부드럽고 편안한 느낌이었다.
“다, 당신은 누구야! 그리고 나는 왜 여기에...?"
준은 그러나 이 남자가 말한 대로 가만히 진정할 수 없었다. 왜 자신이 지금 여기에 있는지 혹은 이 남자가 누구인지 그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안심하라는 것은 무리였다. 한참동안 어둠 속에 있다가 눈을 뜬 지금, 본 적도 없는 사무라이와 같이 있다니... 준은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공포와 불안감에 그만 자리를 뛰쳐나가려 했다.
“앗!"
그때 준은 갑자기 휙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목을 향해 뭔가가 날아드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바로 목 앞에서 멎었다. 깜짝 놀라 그만 그 자리에 굳어진 듯 멈춰선 준이 자세히 보니 그것은 칼이었다. 비록 검집 채로 아직 뽑히지 않은 상태이기는 했지만.
“두 번 살려주지는 않는다. 앉지 않으면 베겠다."
이번에는 앉은 채로 준에게 옆모습만 보이고 있는 그 사무라이에게서 감정이 전혀 배제된 메마른 목소리가 나왔다. 앉은 자세 그대로 칼을 순식간에 뽑아 준의 목에 겨눈 것이다. 그 목소리는 분명히 조선말이지만 그러나 준은 이때까지 그렇듯 감정이 없는 차가운 어조의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갑자기 몸이 오싹하는 듯한 한기를 느끼며 준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불안감도 공포감도 어느 것도 진정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상대는 준이 만일 여기서 더 이상 그의 말대로 따르지 않는다면 즉시 베어버릴 기세였다. 그의 모습이 엄청난 위압감을 가지고 다가왔다.
“내 이름은 하나기리.”
준이 자리에 앉자 이번에는 좀 누그러진 듯한 낮은 목소리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하나기리라고? 준은 그 이름에서 부드러운 어감과 날카로운 느낌 두 가지를 떠올리며 그를 다시 쳐다보았다. 흰 무사복을 입은 데다가 큰 키가 상당히 무사답게 보이기는 했지만 반면 긴 흑발에 약간 가는 몸매와 이상할 정도의 미모(美貌)를 가진 요염한 얼굴이 그러한 두 가지 느낌을 증명해 주는 듯 했다.
그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준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무슨 목적으로 조선인인 네가 이곳 일본에 온 거냐?"
준의 목에서 멎었던 검이 치워졌다. 하지만 준은 날카로운 하나기리의 눈동자가 대신 자신의 얼굴에 비수(匕首)라도 겨루고 있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 그건..."
준은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머리 속이 텅 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잃어버린 것 같은 감각(感覺).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잊어버린 상태로 마치 바보가 된 듯한 멍한 느낌과 같이 머리 속이 백지와 같이 하얗게 변했다.
일시적인 착각이라 생각하려고 했다. 설마 자신이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고 기억하지도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생각을 더듬어 감에 따라 준은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새, 생각이 안 나! 왜? 나의 이름은 준. 그런데 난 왜 여기에 온 거지? 그리고 난... 대체 어떤 사람이지? 생각이... 생각이 나질 않아!"
자기가 누구인지 그리고 왜 여기에 왔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알 수 있는 것은 이름이 준이라는 것, 눈앞의 사무라이에 의해 목숨을 구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무리하게 움직이고 말한 때문인지 급히 숨이 가빠지고는 눈앞이 흐려오기 시작했다.
“눈앞이 어두워져. 이,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눈앞에 보이는 방안의 모습이 마구 흔들리며 회전하는 것을 보며 준은 그 자리에 풀썩하고 쓰러졌다.
“응?"
하나기리는 급히 칼을 내려놓고 준의 눈동자와 가슴을 살폈다. 그리고는 조금 후 안도한 듯 말했다.
“꽤 애를 먹게 하는 녀석이군. 이 준이란 녀석은..."
하나기리는 내려놓았던 칼을 다시 집어들었다. 심장 박동도 정상이었고 눈동자도 풀려 있지 않았다. 뭔가의 충격으로 인해 기억을 잃은 듯 하다고 조금 전 모습으로 짐작했지만 그것은 정신적인 것일 뿐 직접 몸 상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었다.
“몸의 피로가 아직 회복 안된 것 같군. 애를 먹게 하긴 하지만 이 녀석은 왠지..."
뭔가 정이 가는 얼굴이라고 하려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분명 준이라는 이 소년은 귀여운 얼굴이었고 그것은 치료를 위해 그를 바닷가에서 이리로 데리고 오면서, 젖은 몸을 수건으로 닦아주면서도 계속 느껴왔다. 하지만 단지 귀여운 얼굴이라는 이유만으로 냉혹하다는 하나기리에게 정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다른 것이 그의 마음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지만 그것을 그는 애써 부정했다.
“아니야. 난 다만 이 녀석이 좀처럼 오지 않는 조선인, 그것도 어린 녀석이기 때문에 구해준 것 뿐이야."
차가움과 비정함. 이 두 가지를 상징처럼 달고 다니는 하나기리에게 있어 누구에게 호감을 가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언제나 차가웠다.
여자보다 더 예쁜 용모와 신기에 가까운 그의 검술에 반해 그를 흠모하는 여자들은 곳곳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누구에게도 눈길하나 주지 않았다. 또한 그의 비정함은 그와의 싸움에서 패한 상대는 아무리 애걸하더라도 한번에 베어버리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오로지 벚꽃과 검, 단 두 가지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런 그가 왜 이 수상한 조선 소년을 구해주었는가는 의문이자 하나의 작은 이변(異變)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이 하나의 작은 사건은 얼마 후 펼쳐질 또 하나의 사건 ‘교토(京都)의 낙신(落神)’을 알리고 있었다. 그것은 일본 전체를 경악으로 몰고 간 전설적인 승부이자 커다란 전란(戰亂)의 소용돌이였다.

                         - 2 -
“들었어? 하나기리가 이번에는 규슈(九州) 제일의 사슬낫이라는 기노시타(木下)를 베었다는 거야. 글쎄..."
하나기리는 기진맥진해 잠이 든 준을 놓아두고 조용히 밖으로 나가는 도중 ‘유끼미치(雪道)'라고 써붙인, 에치젠에서 제법 알려진 이 여관 겸 선술집 안에서 떠드는 한 떼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직 주인을 만나지 못한 낭인(浪人)인 듯한 네 명이었다. 하나기리는 귀찮다는 듯 얼굴을 한 번 찡그리고 나서 밖으로 나갈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해 머리에 쓰는 가사(笠:일본식 삿갓)를 깊숙이 눌렀다. 아마 어제 폭풍우 속에서 한 결투를 누군가가 본 모양이었다.
“흠, 기노시타라면 그래도 규슈에서는 제법 알아주는 놈인데 어떻게 그렇듯 쉽게 쓰러질 수가 있지? 그것도 일부러 여기 먼 에치젠까지 와서 말이야. 도대체 무슨 원한이 있길래 여기까지 와서 하나기리와 싸운 건지... 알 수가 없어.”
“그게... 일년전인가 그 기노시타의 무리인 노부시(野武士)들이 그가 마침 없던 중에 모르고 규슈 어느 영주의 손님으로 초청되어 가던 도중인 하나기리를 습격했다더군."
“그래서?"
“뭘 물어보나? 당연하지 않나? 현 일본의 삼검신(三劍神)중 하나인 하나기리를 누가 당하겠나? 당연히 그들은 삼십여명이나 되었는데도 단 한 사람인 하나기리에게 모두 깨끗이 목이 날아갔지. 더구나 하나기리는 긁힌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말이야."
“음, 역시 하나기리는 참 무서운 놈이야. 그런 놈과는 행여나 꿈속에서라도 상대하고 싶지 않은데...”
“그래서 이런 농담도 있지 않나? 하나기리와 싸울 바에야 차라리 그 자리에서 배를 갈라라. 그것이 더 편하다 라고 말이야.“
말을 주고받는 자신들 옆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계속되는 낭인들의 목소리를 뒤로하며 하나기리는 유키미치를 나섰다.
팔월의 찌는 듯한 여름이라 시기적으로 아직 눈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눈이 내리면 눈 덮인 산의 풍경과 정취로 인한 백색의 아름다움을 가득 맛볼 수 있는 이곳 유키미치와 그 때가 되면 설국(雪國)이라고까지 불리는 이 북국의 에치젠은 하나기리에게 있어서 마치 고향과도 같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비록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그에게는 일정한 집도 혹은 머물 절도 없었지만 눈이 내리는 겨울이 가까워져 오면 이곳 에치젠에서 그는 거의 일년 중 네 달은 머물곤 했다.
‘그나저나...’
하나기리는 머리에 쓴 삿갓이 오늘따라 좀 무겁다는 느낌을 받으며 생각에 잠겼다. 특별한 목적 없이 떠돌아다니던 중 기노시타의 결투장을 받았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다. 진검승부건 혹은 빗속에서의 승부건 그가 꺼릴 것은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신 있게 약속장소인 에치젠의 해변으로 나갔고 역시 가볍게 그를 베어 버렸다.
하지만 문제는 그 뒤였다. 정체도, 사연도 모르고 더구나 성마저 모르는 낯선 조선소년을 구해 주었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을 죽인 일만 있을 뿐 한 번도 구한 적이 없었던 이제까지의 행동에서 벗어났다는 의미 외에도 그 소년을 끝까지 보살펴야 할 것 같은 알 수 없는 책임감이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지? 그 조선소년은 뭔가의 충격으로 인해 기억을 상실한 것 같다. 그냥 놓아주고 마음대로 하라고 해봐도 지금처럼 우리말을 제대로 못하는 상태로는 채 한발자국도 가기 전에 지나가는 낭인이나 산 속 노부시에게 잡힐게 뻔해. 그렇게되면...'
하나기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다만 혼자서 떠돌아다닐 때는 자기 한 몸만 생각하면 되었고 그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단 한 명이 더 포함되자 금방 복잡한 생각과 고민에 빠지게 된 것이다.
‘어쩌면... 살려주지 말고 그냥 놔두는 것이 나을걸 그랬군. 깨어나서는 말조차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당황하며 또 다른 여러 가지 고통을 겪으며 죽는 것보다는 아까처럼 그냥 편안하게 죽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또 단순히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도 너무 비관적인 생각이다. 당장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해서, 혹은 조선에서 왔다는 것만으로 꼭 죽는다거나 고통을 겪으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러한 생각들로 인해 무심코 고개를 가로 저으며 하나기리는 어두워지는 저녁 무렵임에도 불구하고 가사를 눌러써 얼굴을 감추는 자신이 문득 우습게 느껴졌다.
물론 무엇이 무서워서 그렇듯 얼굴을 감추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삼검신(三劍神)’이란, 사람들이 그에게 지워준 존경과 공포의 칭호가 주는 수많은 귀찮은 일로부터 피해가기 위함이었다.
겨우 사물에 대해판단하기 시작한 일곱 살 때부터 검을 잡아 십 년 후인 열 일곱 살 때 당시 최고 검술가였던 기하라(木原)에게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 후 청풍무심류(淸風無心流) 비전(秘傳) 검법을 전수 받았으며 이십 세가 되던 해, 장군이 주최한 검술대회 우승자인 마사키(正木)를 단 삼초로 패배를 시인하게 만들었다. 쾌속검(快速劍)의 달인이자 어검류(飛天御劍流)를 배운 마사키의 제압해서 삼검신으로 불리게 될 때까지의 지난 동안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승부나 명예에 대한 집념, 혹은 원한 등으로 그에게 도전했고 결국 피를 뿌리며 죽어갔다.
삼검신으로 불리는 세 사람 중 하나기리는 늘 전국을 혼자서 떠돌아 다녔고 때문에 상대적으로 해치거나 혹은 승부를 요구하기가 쉬워 검술을 좀 배워 명예를 높이고자 하는 일본의 모든 사무라이나 낭인들은 늘 하나기리를 표적으로 삼았다. 아직 진검승부(眞劍勝負)에서 한 번도 패배한 일이 없다는 그를 이긴다면 그것은 엄청난 명예와 함께 삼검신의 대열에 올라섬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때였다. 하나기리는 자기가 지금 걷고 있는 길 옆 풀숲에서 뭔가 진동하는 듯한 움직임을 느꼈다. 바람이 조금 불기는 했지만 풀을 그렇듯 흔들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 자연적인 것이 아닌, 인위(人爲)적인 움직임이었다.
‘살기...'
온몸의 감각을 집중한 하나기리는 곧 그곳에서 애써 감추려고 하고 있지만 희미한 살기가 뻗어 나옴을 느낄 수 있었다. 더구나 그것은 한 두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하나기리 이외의 통행인은 아무도 없는 길... 그렇다면 그들의 목적은 분명했다.
‘누군진 몰라도 나를 노리고 있군.'
하나기리는 그래도 태연히 계속 길을 걸었다. 그러자 그 살기도 그를 따라 스슥 하고 이동해왔다. 이젠 너무도 확실해졌다.
“나와라!"
순간 날카로운 외침과 같이 하나기리의 검 미즈류가 번개같이 휘둘러졌다.
풀숲에서는 ‘윽!’ 하는 조그만 신음과 함께 피가 튀었다. 이어서 당황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들켰다!"
곧 풀숲 안의 풀잎들이 팟 하고 솟아올랐다. 공중으로 흩뿌려진 그 풀잎 속에서 수많은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그들은 조금 당황한 듯 했지만 상당히 빠르고 조직적인 공격대형을 갖추고는 하나기리에게 날아들고 있었다.
“아니... 너희들은?!"
좀처럼 감정을 보이지 않는 하나기리도 그 갑자기 나타난 그림자들을 보고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그 동안 많은 노부시들과 도적을 상대했고 정규검술을 배운 성 안 무사라든가 한 유파의 달인(達人)이라고 불리는 검술가도 상대했던 그였지만 이처럼 놀라기는 처음이었다.
“너희들은... 풍마닌자(風魔忍者)!"
챙 하는 금속음이 울렸다.
하나기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떼의 빛줄기... 아니 수많은 번뜩이는 칼들이 떨어져 내렸다. 전신에 검은 옷을 입은 그들이 위로 솟구쳐 올랐다 낙하하며 흩뿌리는 칼날은 정말로 빛이 떨어지는 것과도 같았다. 물론 그 빛은 평범한 빛과는 달리 죽음이라는 그림자를 숨기고 있는 빛이었지만.
하나기리는 재빨리 애검 미즈류를 뽑아 그것을 막았다. 금속성의 음이 연달아 작열(灼熱)하는 가운데 하나기리는 손목을 통해 전해오는 묵직한 진동을 감지하고는 조금 팔을 안쪽으로 끌어 당겼다.
조금 전까지는 다만 칼이라고 밖에 알 수 없었지만 그 빛이 미즈류에 막혀 정지된 잠시의 시간동안 그는 그 칼이 바로 닌자들이 쓰는 작고 날렵한 칼인 인도(忍刀)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자 그중 몇몇이 다시 공중으로 뛰었고 나머지는 짧은 인도(忍刀)의 작은 회전반경을 이용한 소나기 같은 수평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갑자기 당한 일에 하나기리는 기선을 제압 당한 채 방어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기리를 빙 둘러싼 채 한 명이 다가와서 마구 인도를 휘두르며 공격하고는 곧 뒤로 물러서고 그러면 다시 뒤에 있던 한 명이 교대하듯 들어와 공격을 가했다. 그런 식으로 펼쳐지는 수평공격은 하나기리에게 잠시의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더구나 하나기리가 방어하고는 반격하려는 순간에 뒤로 물러서는 그들의 움직임에 장검(長劍)인 미즈류는 공격의 기회조차 잃은 채 연신 검신으로 금속음을 내며 날아오는 칼을 막고만 있었다.
‘매우 약은 녀석들이다. 이 녀석들은...’
하나기리는 그렇듯 자신의 움직임을 봉쇄하고는 세차게 공격을 이어가는 풍마닌자들의 능력에 감탄했지만 곧 감각적으로 그들의 헛점을 찾아냈다.
‘한 녀석이 물러날 때와 다른 녀석이 올 때의 시간 간격.’
비록 아주 빠르게 이어지긴 했지만 그 사이에 보이는 틈을 하나기리는 놓치지 않았다. 그는 그 틈을 노리기 위해 미즈류를 이제까지보다 조금 위로 끌어 올렸다.
그런데 그 순간 그는 뭔가를 잊고 있다는 걸 느꼈다. 중요한 무엇인가를... 그때 조금 전 공중으로 뛴 몇 명의 닌자들이 낙하(落下)하며 그의 머리 위에서 공격해 왔다.
“시마따(아뿔사)!"
하나기리는 상대가 너무도 치밀한데 대해 전율을 금할 수 없었다.
풍마닌자는 그 자체로도 무서운 존재였다. 닌자는 늘 어둠 속에서 움직이지 않고 표적을 노리며 그 중에서 풍마닌자는 바람의 둔갑술(遁甲術)을 이용하여 거의 소리도 내지 않고 상대에게 다가가서 휭 하는 바람과 함께 상대를 죽는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사이에 죽여버린다고 한다. 때문에 제법 이름난 검술가와 낭인도 그들과는 여간해서 싸우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 일도류(一刀流)라는 하나기리의 검법에 대한 약점을 노리고 있었다.
말 그대로 일도류란 하나의 검을 쓰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 방향에서 빠른 공격이 정확하게 들어온다면... 특히 수평과 수직공격의 혼합에는 극히 약점을 보이게 된다. 실력이 높은 고수일수록 대비를 위해 나름대로의 기술로 그 부분을 보완하고는 있긴 했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은 이도류(二刀流)나 무장류(武將流)등, 두 개의 칼을 쓰거나 혹은 큰 검 외에 보조로 작은 중간치의 칼을 가지고 다니는 유파라면 아주 간단히 막을 수 있는 것을 굉장히 어렵게 막거나 피해야만 한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이 녀석들은 지금 내가 누군지 알고 공격하고 있다.'
찍 하는 소리와 함께 오른쪽으로 피한 하나기리의 왼쪽 어깨가 살짝 베어졌다. 고통과 함께 입고 있는 흰옷이 차츰 붉게 물들어갔다.
하나기리는 눈살을 찌푸리고 미즈류를 자신의 정면에 곧게 세웠다. 그다지 신경 쓸만한 상처는 아니었지만 이러한 무리를 상대로 한 싸움에서 절대 먼저 약한 면을 보여서는 안 된다. 집단의 결속력과 사기는 그들이 상대하고 있는 상대가 약하면 약할수록 증가하기 마련이다. 하나기리는 어깨의 상처 따위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오히려 이제부터라는 태도로 그들을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그의 긴 흑발이 크게 출렁거리고는 멎었다. 그러자 방금 공격으로 타격을 입혔다고 판단했던 닌자들은 의외의 반응에 잠시 주춤했다.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하나기리는 어깨에 받은 상처에 어떤 구속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 순간 닌자들이 보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하아!"
하나기리의 일갈(一喝)이 터져 나오며 미즈류가 지평선에 떨어진 마지막 햇살을 머금으며 크게 위로 치켜올려졌다. 그 푸른빛을 띤 하얀 검신에 비친 붉은 햇살. 그 빛이 핏빛으로 보이는 순간 흰 섬광이 갈 지(之)자를 그리며 아래로 떨어졌다.
마치 번개와도 같이 순간적으로 떨어진 검의 빛 뒤에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네 명의 닌자가 신음조차 내지 못하고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겨우 하나의 동작 속에서 순간적으로 네 번의 베기가 이루어진 것이다.
“풍신일도류 제이식(第二式) 순풍비조(順風飛鳥)."
이어서 속삭이는 듯한 소리로 방금 쓴 자신의 초식 이름을 중얼거리는 하나기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가져다주는 위압감은 상처를 입지 않은 나머지 닌자에게도 마치 검에 베인 것과 같은 서늘함을 가져다주었다.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닌자였지만 공포마저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정면 공격으로는 도저히 하나기리를 무너뜨릴수 없다... 그것을 느낀 풍마닌자들은 이번에는 다른 방법을 쓰기 시작했다. 인술을 위한 연막탄(煙幕彈)을 터뜨린 듯 펑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색 연기가 일었고 그 속에서 그들은 모습을 감췄다.
‘드디어 둔갑술(遁甲術)이군. 이 녀석들의 진짜 실력이라는...’
하나기리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정신과 그리고 감각을 최고의 상태로 끌어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 어느 상황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풍마닌자의 둔갑술 앞에서는 아무리 하나기리 같은 고수라도 방심이나 자신 있는 행동이 마냥 허용되지는 않는다. 제 아무리 고수라도 칼이 들어가지 않는, 쇠로 만든 몸이 아니다. 그들의 둔갑술 앞에서 잠시 방심이라도 하게 된다면 의식도 하지 못하는 순간에 죽고 만다.
연기 속에 가만히 서서 정신을 집중하던 하나기리는 드디어 희미하게 들리는 하나의 미세한 소리와 살기가 자신을 향해 달려들고 있음을 느꼈다. 하나기리는 즉시 검을 휘둘렀다.
“하나!"
그러자 쫙 하는 피가 튀는 소리와 함께 하나의 살기가 수그러들었다. 그리고 검은 색 천 속에 모습을 감추고 다가오던 한 명이 다리가 잘린 채 쓰러졌다.
어둠이 짙게 깔리기 시작하는 주위의 모습에서 그렇게 검은 천을 이용한다면 적어도 시각적으로는 거의 눈치채기가 어렵다. 곧 두 번째, 세 번째 살기가 다가왔다. 하나기리는 이제 거의 자신의 시각을 놓아둔 채 기(氣)의 흐름만으로 상대를 포착해냈다.
“둘! 셋!"
다시 하나기리가 검을 휘둘렀다. 사람을 베는 것이 아닌 마치 익은 과일을 따내는 듯한 무심(無心)한 목소리로 숫자를 세며 휘두르는 그의 검에 이번에는 연속해 두 명이 또 쓰러졌다. 마치 그는 혼자서 풀밭에서 춤추듯 움직였고 그럴 때마다 또 한 명이 쓰러졌다. 그것은 죽음의 춤이었다.
“열 셋!"
시체와 부상자가 쌓이고 춤은 쉬지 않고 계속 되었다.
하나기리는 조금씩 가빠오는 숨을 가다듬으며 또 한 명을 베었다. 조금씩 손목이 무거워져 왔지만 그것보다 그는 알 수 없는 사실- 왜 자신에게 어떤 원한도 이해관계도 없는 풍마닌자가 달려드는지- 에 대해 궁금증이 밀려 왔다.
열 세 명째를 베었을 때 그는 약간 급소를 비껴서 베었다. 더 이상의 살기는 없었다. 최초에는 약 스무 명 정도로 생각되는 숫자였지만 아마도 나머지는 도저히 상대도 되지 않는 실력차이에 그만 도망친 것 같았다.
하나기리는 열 세 번째 닌자에게 다가갔다. 그는 급소를 비껴갔고 또한 베인지 얼마 안돼서 아직 살아 있었고 낮게 신음하고 있었다.
피가 줄줄 흘러내렸지만 그 닌자는 손으로 상처를 누르려고도 하지 않았다.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닌자로서 아마도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지 몰랐다.
“왜지?"
하나기리는 많은 닌자들의 피로 인해 붉게 물든 미즈류를 그의 목에 가져다 댔다.
“고통 없이 죽여주기를 바란다면 말해라. 왜 날 노리는지."
그러자 그 닌자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흉측하게 더욱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비웃는 듯한 혹은 분노하는 듯한 그 얼굴은 적어도 죽음이나 고통을 겁내는 얼굴은 아니었다. 하나기리는 그 얼굴을 보고는 자신이 방금 전 한 위협이 아무 소용없을 것이란 사실을 직감(直感)했다.
“하나기리... 과연 삼검신이군. 그러나 네놈도 곧 끝이다. 우리가 그것, 본국검법을 손에 넣는다면 네놈도, 그리고 삼검신도 모두 끝나는 거다. 후마고타로님만이 유일한 검신이 되는 거다. 흐흐흐... 나에게서 네놈은 이 이상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할 거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몸을 한 번 경직시키더니 그대로 몸을 축 늘어뜨렸다. 황급히 그의 눈동자를 살펴본 하나기리는 동공이 풀려감을 확인하고는 조금 놀랐다.
“이놈... 스스로 심맥을 끊었군."
닌자는 임무를 수행치 못하고 잡힐 경우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하는 것이 오랜 전통이다. 그래서 수련과정으로서 익히고 있는 기술 중 하나였다.
하나기리는 피묻은 검을 들고는 잠시동안 그 자리에 서있었다. 갑자기 닥친 이러한 일들이 무엇 때문인지 그리고 자신이 왜 이에 관련되었는지 아직 어떠한 실마리도 잡히지 않았다.
‘무슨 말이지? 삼검신의 최후. 그리고 본국검법? 도대체 풍마닌자가 그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어둠이 깔린 들판에는 멀리 마을에서 비쳐오는 불빛만 깜빡이며 빛나고 있었다. 달이 막 뜨려는 시각... 풀벌레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왔다. 그때 그에게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아!"
하나기리는 갑자기 지금까지 오던 반대편으로 돌아 뛰기 시작했다.
미즈류는 그의 손에서 한바퀴 돌아 검신에 묻었던 핏방울을 사방으로 털어 내고는 익숙하고 숙련된 솜씨로 찰칵하고 검집에 들어갔다. 여전히 인기척이 없어 조용한 길에는 탁탁탁 하는 하나기리의 발자국 소리만 퍼져 나갔다.
‘그 조선소년... 준의 일을 잊고 있었다! 혹시...'
이미 하나기리가 유키미치를 나온 지 한참이 지나 있었다.

                          - 3 -
“역시..."
하나기리는 순간 그의 생각이 모두 들어맞았음을 기뻐할 수 없었다. 엉망이 된 방... 뭔가 저항한 흔적이 보이는 그 물건들의 어지러운 모습과 함께 준의 모습이 이미 방안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녀석들이 노렸던 건 내가 아니고 그 소년이었어."
그래서 그들은 하나기리가 여관을 나서기를 기다렸다가 습격해서 해치거나 최소한 시간을 벌려고 했던 것이다. 또 다른 한패가 소년을 끌고갈 시간을 벌기 위해.
‘그러나 왜?'
방금 그가 구출한 준은 조선인이란 점 말고는 아무 것도 특별할 것이 없는 보통 소년이었다. 풍마닌자에게 원한 같은 걸 샀을 리도 없고 노릴만한 눈에 띠는 보물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검을 찾는 동작을 잠시 보이긴 했지만 단지 동작이었을 뿐 검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나기리는 흐트러진 방 주위를 둘러보았다. 열려있는 창이 보였고 그 창 너머로 잎이 무성한 나무가 눈에 띠었다. 줄기가 아닌 잎만 보이는 이곳은 여관 이층이었다. 따라서 낡은 계단 외에 다른 곳으로 빠져나갈 길이라고 창 밖에 없었다.
올라오면서 보았지만 여관주인을 비롯해 아래층의 술을 마시고 있는 낭인들 중 어느 누구도 닌자가 지나간 것이나 손님중 한 명인 준이 없어진 것을 눈치채고 있지 못했다. 만일 닌자들이 아래층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면 분명 낭인들 일부는 동요했을 것이고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미는 전혀 없었다. 분명 아래층으로 그들은 지나가지 않았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리가 지나간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한 두 명이라면 몰라도 반항하는 누군가를 강제로 끌고 갈 수 있으려면 적어도 네 사람 정도가 필요했고 그 무리가 기척 없이 일층을 지나 이 좁은 복도를 오르는 일은 불가능했다.
‘비록 풍마닌자이고 둔갑술이라고 해도 사람이 그대로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
하나기리는 분명 그들이 창문을 통해 준을 납치해 갔다고 확신했다. 그는 열려있는 창문을 넘어 아래를 보았다. 뭔가 질질 끌려간 흔적... 그것이 어둠 속에서 빛나는 하얀 달빛에 비쳐 보였다. 그렇지만 그밖에 핏자국 같은 것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 준이나 어느 누구도 상처는 입지 않은 듯 했다.
‘하긴...'
하나기리는 갑자기 말도 안되는 상상을 하고 있는 자신이 우스워졌다.
‘아무 것도 모르는 그 조선 소년이 사무라이들도 피해 가는 풍마닌자의 습격 앞에서 조금이라도 그들을 다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내가 잠시 어리석은 생각을...'
그러나 그 순간 다른 생각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분명 그 조선 소년은 상당히 연약해 보였지만... 단순히 연약한 것만은 아니었다. 갑작스런 일에 매우 혼란스러운 듯 했지만 잠시 보았던 그의 눈동자에는 선명한 의지(意志)가 있었다. 또한 스스로 심맥을 끊어 자살한 닌자의 마지막 말도 마음에 걸렸다.
‘그때 분명 그 닌자가 본국검법이라 했다. 그 소년과 본국검법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지? 내가 준을 구했을 때 그의 품속에서는 아무 것도 없었는데.’
본국검법(本國劍法)에 대해서는 일본 무사 중에도 극히 아는 이가 없었다. 원래 고대 일본에 처음 모든 문화를 전수해준 것은 삼국이었고 그 중에 검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신라의 화랑들이 가장 발전시켜 일본에 전한 검법 그것이 바로 이 본국검법이었다.
그러나 전수할 때 신라에서는 그 당시 왜국(倭國)으로 거의 속국상태인 일본에 본국검법 중 단편적이고 통속적인 내용만을 전했을 뿐 그 진정한 절초(絶招)나 검학(劍學)은 전수하지 않았다. 따라서 일본의 검술은 그후 이 본국검법의 형태에 그후 들어온 백제, 중국의 검술을 합쳐 발전하게 되었다.
물론 그러한 것은 고대로 거슬러 보면 드물게 본국검법의 정수(精髓)를 전수받은 사람이 있었고 또한 본국검법의 발생지이자 전수지인 신라와의 교류도 이어졌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본국검법의 진수는 매우 엄청나서 지금 일본 검법의 주가 되고 있는 쾌검술이나 직선적인 초식과는 상대도 되지 않을 정도의 파괴력과 속도, 그리고 변화를 부드러운 곡선의 동작 속에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후 삼국이 통일되고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가 오자 그러한 본국검법은 신라에서부터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또한 무슨 일인지 일본에서도 그나마 거의 없던 전수자들이 다음 후계자들을 찾지 못하고 없어져 버렸다. 그후 일본의 검술은 삼국의 검술과는 다른 독자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검술에 대해 비교적 고류(古流)의 체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청풍무심류(淸風無心流)와 스승 기하라의 비전(秘傳)을 전수 받으며 하나기리는 이 유파의 원조가 바로 이 본국검법이라는 것과 더불어 위의 사실들을 들을 수 있었다. 더불어 이 본국검법의 진정한 모든 초식을 갖춘 자는 능히 최고의 검술가란 말과 함께.
“아!"
그때 갑자기 하나기리는 준이 정신을 차릴 때 보여준 한가지 동작- 뭔가를 찾는 동작을 생각해 냈다.
‘그것은 분명히... 검을 찾는 동작이었어. 그렇다면?'
그때 일어나면서 그가 취한 검을 찾는 동작. 그건 항상 검을 옆에 두고 사는 사무라이의 그것과도 비슷했다. 그렇다면 혹시 그 소년이 그 닌자가 말한 ‘본국검법’ 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나기리는 갑자기 솟아오르는 의문에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또 하나의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난 그 소년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생전 처음 보는 그 소년에 내가 집착할 이유가 없잖아?’
항상 남의 일에 깊이 끼어 들지 않던 그였다. 하나기리, 그는 이때까지 철저하게 자신을 위해 살았고 남을 위해서 뭔가를 해 본적이 없었다. 그냥 이대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여관을 나간다해도 그에게 어떤 가책은 없었다.
“그렇지만...”
하나기리는 겨우 한 번 보고 구해 주었을 뿐인 그 소년이 그 짧은 시간동안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온 것을 느꼈다. 이유는 몰랐지만 하여튼 준이란 그 소년은 이미 그의 마음속에 한 부분이 되어 존재하고 있었다. 새... 마치 소리 없이 나뭇가지에 앉은 작은 새처럼.
‘새(鳥)라... 할수 없군.’
잠시 시간이 흐른 뒤 결심한 하나기리는 훌쩍 이층 창문에서 아래로 뛰어 내렸다. 그리고는 엉망이 된 이층을 향해 동전 몇 개를 퉁겨 넣었다.
‘숙박비는 이거면 충분할 테고.'
그는 허리에 차고 있는 애검 미즈류를 손으로 한 번 쓰다듬었다. 이어서 혼잣말하는 듯한, 혹은 검에게 말하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잘 몰라. 내가 왜 이러는지, 왜 그 소년을 그렇듯 마음에 두었는지. 하지만 적어도 그 소년은 나에게 오래전 잊고 있었던 또 하나의 이름을 생각나게 해주었어. 그 정도로도 충분히 목숨을 걸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넌 어떻게 생각해?"
하나기리의 늘 싸늘했던 얼굴에 그 순간 가벼운 그리움같은 것이 감돌았다. 그는 자신이 쓰다듬던 미즈류에게서 나오는 가벼운 진동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미즈류의 진동이 마치 고개를 끄덕인 듯 여겨졌다.
“그럼 정해진 거다! 흥, 풍마닌자 녀석들. 날 얕보다니! 감히 내가 구해낸 사람에게 손을 대? 그것도 나를 습격하면서까지... 내가 녀석들의 본거지 정도를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나?"
그의 얼굴은 다시 싸늘하게 아니, 오히려 평소보다 더한 차가운 죽음의 빛에 싸였다. 자신이 구해낸 소년 준을 생각하며 잠시 부드러워진 그의 내면에서 냉혹한 무사로서의 하나기리가 다시 눈을 뜬 것이다.
“자, 그럼 미즈류 너에게 피를 실컷 먹여줄게. 날 따라와!"

                         - 4 -
“이것 놔!"
준(俊)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자손과 발을 묶어서 끌고 가고 있었다. 꽉 조일 정도로 단단히 묶여 있어 꼼짝도 할 수 없었지만 경황이 없던 탓인지 그들은 준(俊)의 입까지는 막지 않았다. 따라서 준은 그들에게 마구 소리를 지르며 저항했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그것은 일본어가 아닌 조선어였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누구도 그걸 알아듣지 못했다. 따라서 간혹 지나치는 사람 중 누구도 상당히 빠른 속도로 닌자들과 같이 걷듯이 끌려가고 있는 준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왜!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준은 소리를 치면서도 계속적으로 당하는 이상한 일들에 머리 속이 혼란스러웠다. 마치 시작도 끝도 없는 한줄기의 실처럼 풀려나가 지금 여기에 이른 기억들...
그에게 있어 기억나는 처음 하나는 시커먼 암흑- 정신을 잃고 있었던 때의 그것이었다. 그리고 조금 후 정신이 들었을 때 본 여자 같은, 아니 여자보다 더 예쁘게 생겼을지도 모르는 이상한 사무라이 한 명... 그 사무라이는 준에게 조선에서 일본으로 온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었었다.
일본... 여기는 일본이었다. 그런데 그 질문에 대해 준은 왜 자신이 여기에 어떻게 와 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잃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옆에 아무도 없었다. 살그머니 방을 떠나 도망치려 했었지만 그때 갑자기 방안의 등잔불이 꺼지고는 검은 한 떼의 그림자들이 다가왔다. 소름끼치는 듯한 두려움을 느낀 준은 마구 방안의 물건을 던지며 저항했다. 하지만 그것들-닌자들-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별로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아 준의 몸은 완전히 제압 당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그들에 의해 끌려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기리... 라고 했었지?'
준은 그 무사를 떠올렸다. 적어도 그는 자신을 구해주었다. 또한 웬일인지 좀 서툴기는 했지만 조선어를 쓸 줄 알았다. 차갑긴 했지만 준에게는 그런 차가운 말과는 반대로 따뜻한 느낌의 어조를 쓰고 있었다. 처음이지만 결코 낯설지 만은 않은... 하나기리란 이름의 그가 갑자기 머리 속을 가득 채우는 것을 깨닫고 준은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지. 이대로 난 어떻게 되는 거지? 왜? 무엇 때문에 이들이 날 노린 거지?'
준은 자신이 왜 노림을 당하는지 그것부터가 궁금했다. 정신을 잃고 일본에 떠밀려와 간신히 살아났다. 가진 것이라고는 입고 있는 찢어진 옷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고 기억조차 잃어버리고 있는 상태다. 그렇다고 언제 이들에게 원한을 살만한 일을 했을 리도 없었다.
‘혹시...’
준은 하나의 가정을 해 보았다. 자신은 지금 웬일인지 기억을 잃었다. 그리고 지금 외에 무엇하나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노리는 것은 적어도 지금 현재의 자신은 아닐 것이다.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그때에 어쩌면 이들에게 원한이나 죄를 지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이들이 노리는 물건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다. 이들은 그것을 노리는 것이다.
그리고 혹시... 하며 준(俊)은 또 한가지의 상상을 해보았다. 자신을 살려준 그 하나기리란 사무라이가 언젠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와 주지 않을까 하는...
사실 그에게 그럴 이유도 없었고 그럴 능력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좀 무리한 상상이다라고 생각하면서도 준은 그렇게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에게 희망은 없다. 반응조차 없는 소리를 지르는 것에 지쳐버린 준은 이제 더 이상 소리지르지 않고 그 작은 믿음만을 지닌 채 계속 끌려갔다.


“도리(鳥)! 검을 잡아!"
“싫어! 검은... 무서운 걸."
여섯 살이나 일곱 살쯤으로 보이는 소년- 아니 소녀라고 해도 좋을 예쁜 꼬마와 그의 아버지인 듯한 한 명의 남자가 뜰에 서 있었다. 무사는 아닌 듯 날카로움도 혹은 살기도 느껴지지 않는 그 남자는 그러나 엄격한 모습으로 소년에게 뜰 한쪽에 놓여있는 검을 잡도록 강요하고 있었다.
“도리(鳥), 넌 무사가 되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넌... 죽고 만다!"
그 남자의 모습은 아주 진지했고 결코 장난이나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닌 듯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겨우 여섯 살 짜리에게 검을 쥐어준다는 것은 너무도 무리한 일이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왜 내가 검을 쥐지 않으면 죽는다는 거야? 난 그냥 인형이나 가지고 놀 테야..."
소년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 모습이 정말 깜찍해서 보통사람 같으면 그 순간 그 소년이 무슨 잘못을 했든 혹은 실수를 했든 용서해 줄 그런 귀여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남자는 반대로 그 소년을 갑자기 밀어 쓰러뜨렸다. 앗 하는 소리와 함께 소년은 땅에 쓰러졌다.
“아, 아프단 말야!"
“잘 들어!"
그 남자는 쓰러진 그 소년을 일으키지도 않은 채 그 자리에서 말하기 시작했다. 조금전의 엄격한 표정에서 이제 그의 얼굴에는 자뭇 비정함까지 실려있었다.
“넌 지금까지 나를 아버지라고 생각해 왔겠지만... 사실 난 너의 아버지가 아니다."
“예? 그게... 그게 무슨 말...? 아버지가 아니라니... 그, 그런..."
그 말을 들은 소년은 놀라움과 불안으로 크게 커진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하얗게 변했다.
“훗... 그때...”
하나기리는 잠시의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것은 여섯 살 때, 여태까지 아버지인줄 알고 있었던 남자가 사실은 아버지가 아니었다는 사실과 그가 자신에게 강요해서 잡게 한 검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는 잠시 자신의 애검 미즈류(水龍)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작게 혼잣말하듯 속삭였다.
“아마... 그게 아니었으면 너도 지금은 다른 사람의 손에서 피를 마시고 있겠지. 나의 손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에서 말야."
하나기리는 지금 에치젠 남쪽에 있는 어느 절 앞에 있었다. 절이라 하지만 다 무너진, 지금은 찾는 사람도 없이 버려진 절이었다. 서서히 뜨고 있는 아침해가 센쇼(千照)사라는 이 절의 불타다 만, 비스듬하게 걸린 간판을 비추고 있었다.
‘여기였지. 에치젠 풍마닌자의 본거지가.'
하나기리는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분명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이곳에 있는 닌자들도 자신의 접근을 눈치챘을 것이다. 다만 자신이 누구인지는 모를 것이다. 얼굴에는 예의 삿갓을 눌러썼고 일부러 숙달된 검객의 걸음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걸음을 흉내내어 왔으니까... 아마도 그들은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나의 정체를 확인하려고 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며 하나기리는 기다렸다. 그러자 그의 생각보다 빠르게 곧 반응이 왔다.
“웬일이요? 무사님께서... 이 무너진 절은 지금 아무도 살지 않는 다오..."
평범한 농민 차림새를 한 몇 명의 남자들이 다가왔다. 그러나 예민하고 날카로운 감각을 지닌 하나기리에게는 그들의 옷 속에 흘낏 보이는 검은 색 닌자복과 닌자 특유의 낮은 억양을 감추려는 어조, 그리고 소매 깊숙이 숨겨져 있는 인도(忍刀)가 보였다.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하나기리는 천천히 눌러쓰고 있는 삿갓으로 왼 손을 올렸다.
“나의 이름은..."
아주 평범한 떠돌이 무사 같은 태도... 하지만 그 말을 하며 그는 쓰고 있던 삿갓을 벗어 머리위로 던졌다. 그리고 다음순간 허리에 차고 있는 미즈류를 뽑아 한 번에 그들을 베어버렸다.
“앗!"
“으윽! 너, 너는...!"
그들은 큰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하나기리가 휘두른 검이 정확히 그들의 목을 양단했기 때문이다. 장검(長劍)인 미즈류의 날은 나란히 서있는 썩은 수숫대를 한 베듯 그들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나의 이름은 하나기리."
하나기리는 조금 전 던진 삿갓을 가볍게 받았다. 그와 함께 그의 칼을 맞은 닌자들의 몸이 머리와 분리된 채 피를 뿜으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쓰러진 그들의 몸을 널판지라도 된 듯 밟으며 하나기리는 몇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너희들이 끌고 간 그 조선 소년을 돌려 받으러 왔다!"
빨간 피... 쓰러진 닌자들의 검은 옷에 번져 가는 그 붉은 색 액체가 보여주는 또 하나의 죽음을 보며 하나기리는 센쇼사- 풍마닌자들의 본거지로 들어갔다.

                        제 1 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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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병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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