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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lking About  :  [출간서적 맛보기] 만월의 나라
  Name  :  안병도     * Go 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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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문(序文)

우리 역사에서 구체적으로 고증(考證)될 수 있는 부분 가운데 가장 찬란했던 시기라면 아마도 대부분 삼국시대를 떠올릴 겁니다. 이때 고구려는 넓은 만주(滿洲)지역을 장악했고, 백제는 왜국(倭國)을 속국으로 거느렸으며 신라는 화랑도(花郞道)의 기치아래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아쉬워하며 고구려나 백제에 의한 통일이 이루어졌으면 좀더 강국(强國)이 되지 않았을까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가정(假定)에 의한 아쉬움일 뿐 실제로 고구려나 백제는 군사적인 전쟁만이 아닌 종합적인 외교(外交)와 내치(內治)에 실패한 나라로서 국가간 경쟁에서 진 패배자입니다. 이들이 삼국을 통일했을 때 오히려 전면적인 중국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신라는 작은 영토와 인구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숭무(崇武)정신과 효과적인 외교로 삼국을 통일했습니다. 삼국을 통일한 후 그때까지 의존해왔던 당(唐)과 싸워 그들을 물리친 사실만 보더라도 신라가 얼마나 강하고 활기찬 나라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라는 삼국통일 직후, 심한 혼란과 함께 내부적으로는 화랑도로 대표되는 숭무사상의 쇠퇴를 맞게 됩니다. 또한 왜구(倭寇)들의 노략질과 잇단 재해로 인해 민심마저 멀어집니다. 이것은 막연히 삼국이 통일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 생각한 지도계층이 급변한 정세들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에 원인이 있으며 오늘날 우리가 맞고 있는 어려움과 어느 정도 일치합니다.
이 글은 이런 혼란기의 신라 속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름 없는 촌부(村夫), 명예로운 화랑(花郞), 심지어는 왕(王)조차도 나름대로의 고민과 생각을 가지고 행동해야 했던 시기. 멸망한 나라에의 집착(執着)과 개인적인 욕망(慾望), 터질 것 같은 광기(狂氣)가 교차되는 이 때. 그것을 저는 감히 만월(滿月)이라는 한마디를 통해 여러분의 눈에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안병도

                     제 1 화  늑대를 베는 자


“언제부터 할 텐가?”

일본의 수도 아후미(近江). 가득 찬 달이 환하게 빛나고 있는 만월(滿月)의 밤이었다. 하지만 밝은 빛과는 전혀 상관없이 가마 속에서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은 남자가 있었다.
가마꾼들은 잠시 어디로 간 듯 보이지 않았다. 그 남자는 짐짓 위엄있는 목소리로 앞에 서 있는 두 명에게 말했다.
한 명은 하얀색 바탕에 상서로운 장식을 매단 옷을 입고 있는 음양사(陰陽師)였고 다른 한 명은 음양사의 호위(護衛)인 듯 연한 회색 무사복(武士服)을 입은 사무라이(侍)였다.

“순서가 틀리신 것 같군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던 음양사가 마침내 고개를 들고 가마를 쳐다보며 말했다. 화려한 문양에 금과 은으로 장식되어 있는 가마. 그것은 안에 탄 사람이 상당한 고관(高官)임을 나타내 주고 있었다.

“순서가 틀리다니?”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묻지 않으셨으니까요.”

음양사는 가마 속 남자의 상당히 위압적인 목소리에도 전혀 눌리지 않았다. 오히려 희미한 조소(嘲笑)의 표정마저 보이며 대답했다. 오히려 그의 옆에 있던 사무라이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정말로 모르고 계시진 않겠지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마치 서로 노려보고 있는 것 같은 상태였다.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음양사는 가마에서 눈을 돌려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달이 아주 밝군요.”

“본국(本國)인 백제(百濟)의 복수(復讐)를 위해서다! 하지 않겠다는 건가?”

가마 속 남자의 목소리에 노기(怒氣)가 비쳤다. 그러나 음양사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태연했다.

“저는 백제에 어떤 은혜를 입은 적도 없습니다. 또한 신라에 아무런 원한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일본(日本)의 신하가 아닌가!”

“물론 그렇습니다. 저는 아직 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하겠단 건가?”

음양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또한 그의 시선도 아직 환하게 빛나고 있는 만월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이야기를 하나 해드리죠. 바로 백제의 옛날 이야기를.”

조금 전까지 모든 것이 결정된 것처럼 말하던 남자는 이제 조용히 듣는 입장이 되어 버렸다. 음양사의 눈빛이 달빛을 받아 요사(妖邪)스럽게 빛났다.

“하루는 훤한 대낮에 귀신이 나타나 소리를 지르며 돌아다녔습니다. 백제는 망한다. 곧 망한다. 그런 소리였지요. 그러자 의자왕은 그 귀신을 몸소 목격하고 신하들에게 어서 잡으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 이야기는!”

그것은 백제가 멸망하기 전 사비성(泗泌城)에서 보여진 망국(亡國)의 징조였다. 가마 속에서 비통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마음의 고통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반응을 보고도 음양사는 차가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군사들이 귀신을 쫓아가자 귀신은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군사들이 귀신이 사라진 곳을 파보자 커다란 거북이 한 마리가 나왔고 그 등에는 글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신라는 반월(半月)이요, 백제는 만월(滿月)이로다. 이런 글이었지요.”

“그 이야기라면 이미 알고 있다.”

“의자왕은 점술가(占術家)를 불러 이것이 무슨 뜻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점술가는 말했지요. 만월이란 꽉 찬 달을 말하니 한번 찬 달은 반드시 기우는 법입니다. 그리고 반월이란 아직 차지 않았다는 뜻으로 지금부터 반드시 점점 커진다는 법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신라에 의해 멸망당한 백제의 이야기. 멸망한 백제계 사람인 듯 가마 안에서 남자는 듣고 싶지 않다는 태도였다. 그렇지만 음양사는 그의 말을 무시했다. 음양사 옆에 있는 사무라이는 긴장한 표정으로 음양사와 가마 양쪽을 번갈아 살폈다.

“그 말을 들은 의자왕은 이런 요사스러운 놈을 보았는가! 당장 이 자의 목을 쳐라! 라고 명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점술가를 불러다 같은 점을 치게 했지요. 그는 말했습니다. 만월은 밝아서 모든 것을 비추니 백제가 만월이라 함은 전성기를 뜻하고 신라가 반월이라 함은 보잘 것 없음을 뜻합니다. 의자왕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했지요.”

“뭘 말하고자 하는 거지? 그래서 이제 백제는 망했고 신라가 일어섰으니 포기하란 건가? 일본 제일의 음양사라고 불리는 자네도 할 수 없다는 건가?”

“그 반대입니다. 이제는 상황이 변했으니까요.”

음양사는 고개를 저었다. 바람이 불어와 그의 머리에 얹혀 있는 관(冠)을 살짝 흔들었다.

“뭐라고? 상황이 변하다니?”

“그때는 분명 백제가 만월이었고 신라가 반월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떨까요? 이제 두 나라를 멸망시키고 당나라마저 축출한 신라입니다. 누구도 반월이라고 하지 못하겠지요.”

“그렇다면...”

“지금은 신라를 만월로 부를 수 있겠지요. 가득 차서 기우는 일만 남은 만월 말입니다.”

“과연!”

가마 속의 남자는 그제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감탄(感歎)의 소리를 냈다.

“할 수 있다는 거로군.”

“물론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라를 주술로 저주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그건 사람 몇 명에게 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알고 있기에 특별히 이렇게 찾아온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제야 순서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시겠군요.”

조금전의 긴장했던 표정에서 이제 안도하는 사무라이의 얼굴을 슬쩍 흘겨보며 음양사는 달에서 가마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음양사는 가마 안에서 얼굴조차 보이지 않고 말하는 남자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인정하지. 그럼 언제부터 할 수 있겠나? 신라를 저주하는 그 주술을 말이야.”

“다음 만월이 뜰 때입니다.”

“다음 만월? 왜 만월이어야만 하지?”

“그건...”

음양사의 눈에서 풍기는 요기(妖氣)가 더욱 짙어졌다. 그의 머리 위에서 비추는 달빛이 더 짙은 붉은 색으로 물들었다.

“만월은 음기(陰氣)와 광기(狂氣)를 부르기 때문입니다. 저주도 파괴도 혼란도 모두 만월의 빛 아래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저주, 파괴, 혼란! 그게 가능하다는 건가?”

“삼대성(參大星), 혹은 계림성(鷄林星)이라고도 부르는 신라의 별이 기울고 각지에서 들짐승들이 광기에 싸일 겁니다.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 어두움이 깃들고, 알지 못하는 사이에 모두는 쇠퇴(衰退)를 향해 가게 될 겁니다.”

“대단하군!”

조금씩 떠 있던 구름중 일부가 달을 가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완전히 만월을 가리기 전에 음양사는 붉은 빛이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는 그 달빛에 손을 내밀며 작게 속삭였다.

“그러나 만월은 광기. 때로는 반대로 그 시술자를 미치게 하기도 하지요.”



- 이 땅이 나누어져 있었을 때, 우리 신라에는 삼국통일이라는 커다란 목표가 있었고 그 커다란 희망에 모든 상하(上下)가 일치단결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이루어진 지금 우리에게는 어떠한 목표가 있단 말인가? 남겨진 것은 치열한 전쟁으로 피폐해진 땅과 지친 백성들, 그리고 갑자기 맞은 평화로 인해 나태해져 버린 귀족들뿐이다. 북쪽에서는 고구려 유민들이 웅장한 기상으로 대륙을 향하고 있고 남쪽에서는 왜국(倭國)이 본국(本國)을 노리고 있건만 정녕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폐하... 무엇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신라의 수도(首都) 금성(金城:경주) 외곽, 이곳에 지금 12월의 차가운 겨울 바람을 맞으며 한 노년(老年)의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부드러운 빛을 띠면서도 위엄 있는 얼굴이었고 두 눈에는 한없는 총명한 기운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낮은 언덕 위에 올라 있었다.
삼국 중 가장 작은 소국(小國) 신라의 중심지에서 지금은 일약 통일신라 전체의 도성(都城)이 된 금성 전체가 그의 눈동자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안심할 수 없다는 듯 불안과 걱정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니다. 시중(侍中)."

그의 이름은 법민(法敏). 바로 현 신라의 국왕인 문무왕(文武王)이었다. 부친인 태종 무열왕의 재위 때 김유신 장군과 함께 백제를 쳐서 멸망시키고 이어서 즉위 후, 나당 연합군을 결성해 고구려마저 멸망시킨 장본인이다.
그런데 그런 삼국통일이라는 대업(大業)을 완성시킨 그는 지금 고뇌(苦惱)하고 있었다.

“바람이 찹니다, 폐하. 이제 그만 돌아가시는 것이..."

추위를 이기지 못한 시중이 슬며시 재촉했다.
한때는 이보다 훨씬 추운 한파(寒波)에도 전장(戰場)에서 병사들을 독려하며 야영했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겨우 이 정도의 추위에 못 견딘단 말인가? 문무왕은 문득 치밀어 오르는 생각에 그만 시중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 무언의 노기(怒氣)를 접한 시중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숙였다.

‘하긴 지금은 그때가 아니니까. 지금은 백제도, 고구려도 없고 아버님도 김유신 공(公)도 없으니까.'

그는 새삼스럽게 약간의 시간이 흐른다는 것이 얼마나 모든 것을 변화하게 하는가를 깨닫고 있었다.
몇 번이고 실패한 끝에 간신히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통일의 기쁨을 맛보았을 때, 이어서 당군(唐軍)을 매소성 싸움과 금강 하구 싸움에서 격파하고 완전히 축출했을 때만 해도 신하들 모두는 용맹했고 나라를 위해서 도움이 된다면 자신 하나쯤 당장이라도 희생할 수 있다는 충성심에 불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겨우 그때로부터 채 십 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전부 이 정도까지 나약해졌다. 왕은 크게 한숨을 쉬고 나서 시중에게 물었다.

“왜국(倭國)은? 왜국에 보낸 사신은 어떻게 됐나? 아직도 소식이 없는가?"

“그것이... 아직 왜국에는 백제계(百濟係) 세력이 너무 뿌리 깊어서 힘들 것 같습니다. 폐하."

“그런가..."

왕은 고개를 돌려 남쪽을 보았다. 벌써 삼 년 전부터 줄곧 신라는 일본을 설득하고 회유하고 있었다.
모국(母國)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를 원수로 규정하고 끊임없이 해안을 침범하여 노략질과 살인을 저지르는 그들이었다. 그전 같으면 당장 군사를 일으켜 응징했을 터였지만 이제 명장 김유신을 비롯해 많은 장수를 세월과 함께 잃어버렸고 수 차례 전쟁으로 인해 지쳐버린 신라에게는 그럴 힘이 없었다.
물론 정말로 국력을 다 기울여 원정을 감행한다면 굴복시키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얻는 이득은 별로 없는 채로 가뜩이나 지쳐있는 백성들을 더욱 괴롭히는 결과밖에 안될 것이다. 문무왕은 귀족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대한 회유정책을 강하게 밀고 나갔다. 총명한 신하와 고승들을 계속 보내 문화를 전해주는 한편 삼국을 통일한 신라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했다.
왜국도 변화하고 있기는 했다. 그들은 공식 국호를 ‘왜(倭)’에서 ‘일본(日本)’이라 바꾸며 백제와의 단절을 선언했다. 하지만 워낙 백제와 일본은 뿌리깊은 유대관계에 있었다. 멸망한 백제에서 도망간 다수의 귀족과 왕족이 그곳에 망명해 있는 터라 언제나 사신은 실망스런 대답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대로는... 이대로는 안돼. 신라는..."

들릴 듯 말 듯한 혼잣말이 왕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문무왕이란 이름 그대로 그는 문과 무에 모두 능했다.
그는 총명하고 재기(才氣)있는 신하라든가 용맹 넘치는 화랑(花郞)과 있을 때는 늘 즐겁게 웃었다. 하지만 허약하고 무능한 신하들에 둘러싸여 있을 적에는 우울하고 혼잣말을 하는 일이 많았다. 속을 털어놓을 수 없고, 털어놓는다 해도 제대로 이해해 주지 않는 신하만큼 그를 답답하게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요즈음 그는 항상 혼잣말을 해야했다.

“폐하."

이제는 눈에 확실히 보이도록 몸을 떨고 있는 시중이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답답했다. 패기도 용기도 없이 현명함이나 지혜로움조차 보이지 않는 신하들의 모습에 왕은 가슴에 무거운 돌이라도 들어간 것처럼 갑갑함을 느꼈다. 결국 그는 몸을 돌리며 소리쳤다.

“돌아간다! 준비해라 시중."

“예, 폐하."

바람이 확 하고 불어와 그가 입고 있는 옷을 날렸다. 서서히 저녁이 되어 가는 금성. 차가운 하늘에는 만월(滿月)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디선가 가느다랗게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다.



“늑대다! 늑대가 나타났어!"

“뭐야? 늑대라고!"

“늑대 떼가! 모두 피해!"

금성에서 조금 떨어진 영천. 조그만 마을 월성촌(月成村)은 막 들이닥친 늑대 떼와 공포에 질려 도망치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근처에 늑대가 나타난다는 소문과 함께 늑대에게 당했다는 마을의 이야기가 퍼졌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그냥 대수롭지 않은 헛소문으로 생각했었다.

“미친 늑대 떼가 마을을 습격한다는 소문이... 사실일 줄이야!"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아서 그런지 늑대는 마을 바로 앞 산 속에서 잔뜩 살기를 머금은 흉폭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겨우 산등성이에 걸려 있는 해가 완전히 숨어 버리면 곧 덮쳐 올 것이다. 달빛이 만들어내는 숲의 어둠 속에 모여 있는 그것들의 퍼런 눈빛을 보며 마을 사람들은 모두 비명을 지르며 마을을 버리고 도망치고 있었다.

“천벌(天罰)이야... 이건 천벌이라고! 조그만 소국인 신라가 당(唐)을 끌어 들여 억지로 삼국을 통일한 것에 하늘이 벌을 내리는 거야!"

마을 촌장인 듯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은 혼이 나간 듯 이렇게 연신 외치면서 우르르 도망쳐 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는 자식의 손을 끌면서 도망치는 아낙네의 '촌장님, 어서 도망치세요!' 하는 말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몽둥이를 쥐고 물러나면서 '뭐하세요? 여긴 위험해요!' 하는 마을 청년의 말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는 오로지 어둠이 깔리는 하늘만을 보고 있었고 수없이 천벌... 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누, 누가 촌장님을 좀 모셔와요!"

도망치던 중에도 그것을 보다못한 한 명이 말했다. 그러자 곧 나무몽둥이를 든 청년 한 명이 우르르 도망치고 있는 사람들의 대열에서 나와 반대로 마을 쪽으로 달려갔다.

“촌장님! 위험합니다. 같이 피해요!"

그 청년은 노인에게 황급히 다가가 몽둥이를 쥔 오른 손이 아닌 왼손으로 노인의 오른팔을 잡으려고 했다.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은 듯한 촌장을 억지로라도 끌고 이 자리를 피할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막 노인에게로 가까이 왔을 때 산등성이에 간신히 그 끝자락을 걸치고 있던 해가 드디어 완전히 그 너머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 순간 사방에는 약간 푸른색을 띤 달빛만이 깔렸다. 그 청년은 어느새 그와 노인 주위를 완전히 둘러싸고 있는 새파란 안광(眼光)의 무리를 보았다.

“아, 아니?"

-크아앙!

“으아악!"

달조차 빛을 잃은 캄캄한 어둠 속이었다. 붉은 핏방울조차도 검게 물들어 보였다. 잔뜩 피에 굶주린 듯 이빨을 드러내고 있던 늑대들이 일제히 달려오고 있던 그를 덮쳤다.
고통과 공포에 가득 찬 청년의 비명과 함께 노인은 그의 몸에 투둑 하고 튀어 오르는 뜨뜻한 액체를 느껴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 느끼고 있는 공포를 견디려고 애쓰며 한마디만을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천벌'이란 한마디였다.
쓰러져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던 청년의 소리가 잦아들었다. 살점을 뜯고 피를 핥는 늑대들의 울음소리만이 가득한 속. 노인은 천천히 다가오는 사람의 기척을 느꼈다.
그 기척은 당황해서 달려오는 것도 아니었고 또한 겁을 먹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조심스럽지만 동시에 상당히 신속한 발걸음... 그것은 흡사 짐승을 노리는 사냥꾼의 움직임과도 닮아 있었다.
하지만 노인은 그것을 오래 느낄 수 없었다. 이어서 그의 목을 향해 사방에서 뛰어 오르는 짐승들... 입과 이빨에 피를 잔뜩 머금은 늑대들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노인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던 듯 했다.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어둠 속에서 그 늑대들이 내보이는 시뻘건 이빨을 보자 몸을 떨었다. 그의 입에서 비명이 울렸다.

“으악!"

그때 그의 눈앞에 늑대들의 하얀 이빨보다 더 새하얀 빛이 지나갔다. 차가운 금속성의 빛. 노인은 발 밑에 툭 하고 떨어진 두 개의 물체-아직도 꿈틀거리고 있는 늑대의 목 두 개-를 보았다.

“이, 이건 도대체?"

“천벌이라고? 웃기는 소리하지마!"

목소리가 들려오자 노인은 그제야 앞에 서있는 남자를 보았다. 오랫동안 빗지 않은 듯 산발한 머리카락에 푸른색 머리띠를 하고 있었다. 외관상으로 보아 갓 스물이 된 듯한 청년이었다. 어둠 속이라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입고 있는 옷이 상당히 지저분해 보였고 체격이 좋은 것으로 보아 농민이나 노비, 혹은 천민 신분인 듯했다.

“웃기는 소리라고?"

“웃기는 소리지! 천벌이라니... 그렇다면 이런 하등한 늑대 따위가 하늘을 대리하는 영물(靈物)이라도 된단 말이냐?"

청년은 손에 커다란 검을 들고 있었다. 비록 화랑(花郞)이나 장수들이 쓰는 길고 매끄러운 장검은 아니었다. 보졸(步卒)들이 쓰는 투박한 그 검에는 방금 그가 베어낸 늑대의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늙은이 같으니. 잘 봐둬! 이것들이 과연 천벌 따위를 내릴 수 있는 영물인지 아니면 그냥 피에 미쳐버린 늑대들인지 말야!"

청년은 노인에게 그렇게 내뱉듯 소리치고는 기합을 지르며 조금 전 두 마리가 죽은 후 잠잠해진 늑대들 속으로 검을 휘두르며 뛰어들어갔다.
늑대들이 곧 미친 듯이 그를 향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그런 늑대들에 대해 그들보다 더한 광기의 고함을 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어떤 특별한 검법을 익힌 것도 아닌 듯 그냥 마구 발광하듯 휘두르는 검이었다. 하지만 엄청난 기세와 힘이 실린 그 검은 무서운 속도로 휘둘러져 달려드는 극대들을 두 동강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을 물기 위해 얼굴로 달려드는 늑대의 머리를 자신의 입으로 물어뜯어 버렸다.

“이, 이건... 저건 사람이 아냐. 피에 굶주린 또 하나의 짐승이야!"

노인은 청년이 늑대들과 싸우는 모습을 보고는 완전히 넋을 잃고 말았다. 수 십 마리의 늑대 떼에 검 하나만을 쥐고 달려들다니! 그것만으로도 능히 사람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지금 청년은 피를 본 늑대들보다도 더 철저히 광기에 휩싸여 싸우고 있었다. 노인은 이러한 사람이 하늘아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그만 늑대들의 이빨이 다가왔을 때보다 더 싸늘한 공포를 느꼈다.
잠시 후 마지막으로 미쳐 날뛰던 늑대 한 마리의 울음이 자지러졌다. 동시에 조금 헐떡이는 듯한 청년의 가쁜 숨소리가 커져왔다.

“이봐! 봤지? 이래도 이 늑대들이 천벌이라고 소리칠 건가? 고작 나 하나에도 죽어버리는 이런 짐승 따위가? 이것이 천벌이라면... 내 부모와 마을 사람들은 도대체 하늘에 어떤 죄를 지었다는 거지? 대답할 수 있겠나? 대답해 보라고!"

늑대 울음소리에 가리워 졌던 듯 숨어버렸던 달빛이 조금씩 밝게 비쳤다. 그 속에서 노인은 온통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청년을 보았다. 말할 수 없이 처절한 모습. 그리고 노인은 청년의 눈에 서려 있는 짙은 슬픔을 보았다.

“자네는... 도대체 누구지?"

“낭파(狼破)."

청년은 손에 든 검을 천천히 올렸다. 피에 물든 하얀 날이 달빛 속에서 요염하게 빛났다.

“늑대를 쫓는... 늑대를 베는 자."

낭파는 노인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늑대보다 더 미쳐서는 검을 휘두르던 광인(狂人). 노인은 그의 미소를 보고 다시 한번 '천벌' 이라고 중얼거렸다.



“만일 정말로 천벌 같은 게 있다면 세상은 좀더 살기 편할 거야."

타닥타닥 타는 모닥불의 불꽃이 반짝이는 가운데 낭파(狼破)는 휴우 하고 긴 한숨을 뿜어냈다. 많은 길을 걸어온 여행자나 고된 일을 마친 일군과 같은 태도였다. 노인은 비로소 눈앞에 있는 자가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낭파의 온몸에 걸쳐 묻어 있는 붉은 피는 질릴 정도로 비릿한 냄새를 풍기며 노인을 압박했다. 노인은 자신이 입고 있던 하얀 웃옷을 벗었다.

“이것으로 우선 피를 닦게. 끈적해서 기분 나쁠 테니까."

“응?"

조금 놀란 낭파는 노인이 내민 웃옷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군데군데 점 같은 핏방울이 튀어 있었지만 비교적 깨끗한 그 옷은 촌장이라는 위치를 나타내듯 구하기 힘든 비단옷이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해 주는군. 목숨을 구해주었다고 생각해서 하는 답례인가? 아니면 동정인가? 그 어느 쪽도 필요 없어. 나는 늑대를 죽였을 뿐, 별로 특별히 당신을 구하려고 하지 않았으니까."

낭파는 고개를 돌리며 싸늘하게 노인이 내민 그 비단 웃옷을 거절했다. 방금 전까지 늑대를 상대로 미친 듯이 피범벅이 되어 싸웠던 그가 지금 귀족이나 입을 수 있는 비단 천으로 피를 닦는 건 우스운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아직 노인은 몰랐지만 낭파가 처한 비천한 신분에 인한 반발이기도 했다.

“그 어느 쪽도 아니네! 낭파 라는 이름을 한 사람에 대한 걱정일 뿐이지. 단순히 자네가 다만 늑대의 피에 굶주린 야수일 뿐이라면 그것으로 좋아. 하지만 자네는 분명한 사람이 아닌가? 그 어떤 사람이 피를 뒤집어쓰고 기분 좋을 수가 있지?"

“사람... 이라고?"

낭파가 조금 놀란 듯한 표정으로 노인을 쳐다보았다. 아직 채 살기가 가시지 않은 그의 눈동자와 노인의 힘없는 듯, 혹은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눈이 마주쳤다.
낭파는 노인의 눈을 보면서 오른 손에 쥐고 있는 피에 젖은 검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렇게 비어 있는 손을 노인에게로 내밀었다. 노인은 그런 낭파에게 조금 미소를 지어 보이고 웃옷을 건네주었다.

“처음이군. 늑대를 죽이기 시작한 이후로 나를 사람이라고 불러주는 사람을 만난 것도. 전부가 다만 나를 괴물이라든지 미치광이로 불렀는데..."

거친 감촉의 무명과 달리 부드럽고 매끈한 비단의 감촉을 느끼며 낭파는 그것으로 몸에 묻어있는 피를 닦았다.
얼굴과 목 등의 피를 닦아내고 이어서 다른 곳도 말끔히 닦아내자 비로소 그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이제 막 소년의 티를 벗어난 말끔한 얼굴... 노인은 낭파가 거친 행동과는 달리 상당히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왜 그렇듯 늑대를 죽이는 거지? 방금 전 말한 그대로 그것들에게 가족을 잃은 복수인가?"

노인은 낭파란 이름이 가지고 있는 의미- 늑대를 깨뜨린다 라는 것을 생각하며 물었다. 미친 늑대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돈 것은 이미 일년전 일이었다. 노인은 낭파가 그 늑대에게 참혹하게 살해된 부모와 마을 사람들을 보며 빠져 나온 생존자 가운데 한사람일지 모른다는 짐작을 했다.

그러나 낭파는 이런 노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을 굳히며 피를 닦은 비단 웃옷을 노인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나야말로 궁금해. 어째서 이런 피에 굶주린 짐승 따위의 살인극을 천벌이라고 부르며 목숨을 버리려 한 거지?"

“그건..."

노인은 이미 모닥불에 비친 낭파의 뭔가를 참고 있는 듯한 표정에서 조금 전 물었던 그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그가 낭파의 물음에 대답할 차례였다.

“나 역시 이 늑대 자체가 천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렇다면?"

“자넨 이러한 미친 늑대가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생긴다고 보나?"

노인이 조금 전까지의 멍청하고 나약한 모습과는 다른, 아주 강렬한 모습을 보이며 낭파를 응시했다. 연약한 늙은 촌장에서 갑자기 점술사(占術士)와도 같은 모습을 한 그의 변화에 낭파는 조금 놀라서 말없이 그를 주시했다.

“하늘의 기(氣)... 그 중에서 우리 신라를 나타내는 계림성(鷄林星)이 쇠하고 있어. 아직 아무 것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본래 국가의 흥망성쇠(興亡盛衰)는 그렇듯 갑작스럽게 기울어지지 않는 법인데도 말이야. 이것은 아마도..."

“흐음, 무슨 소리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결국 이상하다는 거로군. 아마도 뭐지?"

“어느 나라에선가 우리 신라를 저주(詛呪)하는 대규모의 제(際)가 열리고 있는 거야.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제사에 천기가 응(應)하고 있다는 거지. 이것이 천벌이 아니고 무엇일까?"

노인은 여기까지 말하고는 천천히 오른 손을 들어 밤하늘 한쪽을 가리켰다. 무엇에 홀린 듯 그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향한 낭파는 희미한 빛을 내며 서서히 떨어지는 별 하나를 보았다.

“저것이 바로 계림성이야. 아직 정상적인 천기가 신라를 흥하게 하려 하고 있음에도 지금 저 빛은 망해가는 나라의 빛을 띠고 있어..."

“천벌..."

낭파는 노인이 가리키는 그 별이 정말 꺼져 가는 촛불처럼 가물거리며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그만 자신도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곧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봐! 그래서 고작 한다는 것이 천벌이라고 소리치며 바보같이 늑대에게 목숨을 버리려고 한 건가? 그 정도까지 알고 있다면 또한 그것을 막을 방법도 알고 있을 텐데?"

“그렇게 욕을 먹어도 할말은 없군. 나 역시 한때 이러한 움직임을 혼자서라도 막아보려고 애쓴 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도 이러한 나의 말에 귀 기울여 주지 않았어. 절망할 수밖에 없었지. 그래서 마침 늑대가 온 지금 스스로 미친 것으로 가장해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거야. 나를 구하러 왔다가 목숨을 잃은 그 젊은이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렇다면 아까의 그 소국인 신라가 어쩌고 한 것은 거짓말이었군. 스스로 미친 듯이 보이기 위한..."

낭파는 단순히 약하고 이상한 노인이라고 생각했던 그가 예상외로 상당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는 생각에 조금 전까지 너무 심한 말을 했다는 미안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는 그런 식으로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방법을 택한 노인을 이해하려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단순히 죽어버려 모든 것이 끝난다면... 나는 진작에 죽었어야 했을 거야. 하지만 생각해보니 우습군. 스스로의 몸에는 별로 화도 미치지 못할 장래 신라의 국운(國運)을 가지고 살아있는 현재의 목숨을 포기하려 하는 노인이 있다는 것이 말이야."

“단순히 어떤 늑대가 가족을 죽였다는 이유로 모든 늑대를 상대로 복수를 하려하는 젊은이 역시 우습기는 마찬가지야."

“뭐라고!"

낭파는 얼굴빛이 변하며 옆에 놓아둔 검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아직도 붉은 피가 진득이 묻어 있는 그 검을 노인의 목을 향해 들이댔다.

“너... 너 따위가 뭘 안다는 거지? 어느 날 갑자기 사냥에서 돌아오자 피투성이가 된 채로 집 앞에서 굶주린 늑대들에게 살과 뼈를 씹히고 있는 부모를 보았을 때 그 심정 같은 걸 느껴보기라도 했다는 거냐? 아니면 그후 늑대에 대한 증오를 품고 이름조차 바꾼 채 미친 사람 취급을 받으면서까지 그 늑대들을 쫓아 모조리 죽인 후 그 자리에서 통곡한 사람을 볼 수라도 있었단 말이냐!"

그러나 노인은 목 앞에서 금방이라도 내리쳐질 듯 파르르 떨리는 검을 보면서도 태연한 표정이었다. 그는 낭파의 분노한 눈을 잔잔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잠시 후 그는 가만히 손을 내밀어 검날을 만졌다.

“차갑군. 너무 차가워. 한 번의 원한에 차가워진 자네의 마음은 수많은 죽임 당한 늑대들의 뜨거운 피로도 따뜻해지지 못하는 건가?"

“헛소리 마!"

“자식이 부모와 가족을 위하는 것. 그리고 백성이 나라를 생각하는 것은 모두 같은 당연한 마음이야. 하지만 부모를 위한다고 해서, 혹은 나라를 위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버려져도 좋은 걸까? 오히려 생각을 한 번 되돌림으로 인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이런..."

노인의 목 언저리까지 다가온 검날이 심하게 떨리더니 마침내 치워졌다. 중상을 입은 환자처럼 비틀거리는 낭파의 몸이 노인에게 등을 보이며 돌아 선 것은 그와 동시였다.

“그때 죽도록 놔두었어야 했는데."

노인은 이렇게 중얼거리는 낭파의 말을 들으며 탈것이 모자라 약해진 모닥불에 나무줄기 몇 개를 집어넣었다. 타닥타닥 하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둘은 잠시 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본국검법(本國劍法)을 배워보지 않겠나?"

“뭐라고?"

한참 후 노인은 그와 모닥불을 향해 등을 돌린 채 앉은 낭파에게 말을 걸었다.
본국검법... 처음으로 듣는 이름이었지만 그 순간 낭파의 머리 속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느낌이 스치고 지나갔다. 자세히는 몰랐지만 검법이라는 것은 왕족이나 육두품 등 화랑들이 배우는 것으로 비천한 평민 사냥꾼의 신분인 그에게는 전혀 관계없다고 생각되던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노인의 말은 묘한 친근감과 함께 이때까지 단순히 증오만에 가득 차 있던 낭파의 머리 속에 이상한 유혹(誘惑)으로 다가왔다.

“뭐지? 그 본국검법이란 것은?"

낭파는 그만 조금 전까지의 분노도 잊은 채 돌아보며 물었다. 노인은 조용한 목소리로 마치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르는 아이에게 들려주는 것처럼 천천히 말했다.

“본국검법은 검무(劍舞)에서 유래된 검법으로 몇 백년 전 우리 신라의 무동(舞童)인 황창랑(黃倡郞)이 백제의 왕을 죽일 때 춘 춤이 그 시초가 되어 전하고 있는 무술이야. 지금이야 삼국을 통일한 신라지만 그 당시만 해도 신라는 정말 약했지. 이웃의 백제, 고구려에게 눌려 간신히 목숨만 이어가고 있는 형편이었어. 그러던 그때 백제왕이 신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전쟁을 준비한다는 소문이 퍼졌고 그 말에 온 신라 백성들은 공포에 질려 어쩔 줄 몰랐지."

“그래서 그 황창랑이 백제왕을 죽인 건가? 전쟁을 막기 위해서?"

“그래. 왕으로부터 백성까지 모두 백제의 침략을 겁내 갈팡질팡하고 있는 가운데 아직 16살 소년인 황창랑이 왕 앞에 나아가 반드시 백제왕을 죽여 전쟁을 막아보겠다고 약속했네. 그는 곧 백제에 들어가 저자거리에서 칼춤을 추었는데 그 춤이 매우 신묘(神妙)하고 아름다워 구경하는 사람으로 곧 담을 이루었지. 그래서 백제왕은 이 이야기를 듣고 그를 궁으로 불러 마루 위에서 그 춤을 추도록 명하였는데 창랑은 그때 기회를 보아 왕을 찔러 죽였지. 물론 그도 붙잡혀 죽고 말았지만."

“결국 전쟁을 막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린 셈인가? 그는..."

낭파는 어느새 조금씩 노인이 들려주는 본국검법의 이야기에 끌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본국검법' 이라는 이름이 이후로 그의 앞날을 얼마나 많이 바꾸는 계기가 되리라는 것 알지는 못했다. 다만 어떤 모르던 세계를 보는 듯한 아이의 표정으로 눈을 빛내며 듣고 있었다.

“그런 거라고 볼 수 있겠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황창랑 자신은 그렇듯 하나의 전쟁을 막고 허무하게 죽었지만 그가 남긴 그 검무가 남겨져 전해 졌다는 거야. 그가 그렇듯 백제왕을 죽이고는 잡혀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의 모친은 슬픔에 잠겨 매일을 눈물로 지샜고 결국 눈이 머는 지경까지 이르렀다네. 이것을 본 신라 사람들의 기분이 어땠겠나? 그들이 그저 공포에 떨었을 뿐 아무런 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겨우 16살의 소년이 한 자루의 칼을 쥐고 백제왕의 궁궐에 뛰어들어가 백제왕을 죽이지 않았나? 사람들은 모두 용기를 얻었고 또한 너도나도 검을 쥐고 황창랑이 추었던 그 검무를 흉내내어 배우기 시작했어. 모두 자신 혼자 백제의 왕이라도 능히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과 애국심에 불타오른 거야. 더불어 그것에는 죽은 창랑에 대한 애통한 감정까지 섞여 있어 그 춤을 출 때마다 그들은 '창랑이 돌아왔다' 라고 외쳤네. 곳곳에서 울리는 그 소리에 눈이 멀었던 창랑의 모친은 아들이 돌아왔다고 기뻐하며 눈을 떴다는 이야기야. 이것이 바로 지금 신라의 국검(國劍)인 본국검법의 기원이지."

“백제왕을 죽인 검무에서 유래한 검법이라..."

낭파는 문득 자신이 조금 전 늑대를 죽이는 데 썼던 검을 쳐다보았다.
단지 농사를 지으며 틈틈히 활과 덫으로 짐승을 사냥해 그것으로 먹고살던 그였다. 낭파의 집에 원래 검이란 없었다. 늑대에게 복수하기 위해 조금 알고 지내던 보졸에게 부탁해서 얻은 것이었다. 낭파는 그저 이것을 미친 듯이 휘둘러 늑대를 베었을 뿐이었다.
따로 그것을 쓰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러한 '검법' 이라고 불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해 본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단지 원한에 미쳐서 늑대를 죽이며 돌아다녔던 스스로가 이전에 본적도 없던 노인의 '본국검법' 이라는 한마디에 강한 유혹을 느끼는 것을 정말로 이해 할 수 없었다. 지금 그의 마음속에서는 이제까지 그가 사로잡혀있던 분노보다 더 강한, 알 수 없는 감정이 치솟고 있었다.

“배울 생각이 있나? 본국검법을..."

노인은 낭파의 얼굴에 떠오른 미묘한 갈등을 눈치채고 확인하듯 다시 한 번 물었다. 낭파는 보통 같으면 한마디로 웃기는 소리라고 비웃으며 넘겨 버렸을 노인의 말을 거절하지 못했다.
낭파는 혼란한 정신과 마음을 추스르며 아무 말 없이 손에 들고 있던 검을 가만히 들어 얼굴 위까지 올렸다.

“그 본국검법을 익히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거지? 비천한 신분의 내가 그러한 검법을 익혀 봐야 결국 태평스러운 귀족들의 술자리 여흥거리로나 될 것이 아닌가? 난 그런 검법 따위는 배우고 싶지 않아!"

“낭파. 자넨 본국검법의 또 다른 의미가 무엇인 지 아나?"

“또 다른 의미라니?"

낭파는 노인의 말과 그 속에 담겨있는 유혹을 거절하려 했다. 신분을 생각하며 힘겹게 거절하려는 낭파의 말은 일종의 자조(自嘲)를 내포하고 있었다.
신분제, 특히 골품제(骨品制)가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는 신라에서 신분이라는 것은 능력의 유무를 떠나 개개인을 묶고 있는 무형의 족쇄였다.
왕족인 성골이나 진골, 그리고 대 족장 신분에게 부여하는 육두품 지위부터 거의 평민에 가까운 이두품까지 있는 이 신분제도 속에서 낭파의 지위는 농사나 사냥일 같은 것만 할 수 있는 일두품 평민 신분이었다. 그가 아무리 학문을 잘한다고 해도, 혹은 무술에 뛰어나다고 해도 그는 그대로 농사만을 지어야 했다. 그러나 이렇게 스스로를 비웃으며 거절하려는 낭파에게 노인은 다시 알 수 없는 의미의 말을 꺼냈다.

“본국검은 다른 말로 신라검, 혹은 화랑검 이라고 불려지지. 다른 한편에서는 자룡검(刺龍劍)이라고 불려지지. 이는 말 그대로 '용을 찌르는 검법' 이라는 소리야.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있겠나?"

“전설의 동물인 용을... 찌르는 검이라고? 그만큼 검법이 신묘하다는 이야기인가?"

“일반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기 쉽지. 그러나 이건 그렇듯 간단한 의미가 아니야. 용이란 바로 한 나라의 왕을 뜻하는 말이야. 원래 이것은 자왕검(刺王劍)이라고도 불려졌지만 너무 위험한 이름이기에 약간 숨겨져 자룡검이라고 이름 붙여진 거야. 알겠나?"

“그렇다면?"

낭파는 노인의 말이 의미하고 있는 중대함에 포기하려던 것을 잊고 다음 말을 재촉했다. 노인도 이젠 처음의 한마디씩 던지던 모습이 아니라 진지하게 뭔가를 가르치는 스승의 모습으로 힘을 주어 말했다.

“왕을 죽이는 검. 혹은 왕을 죽일 수 있는 검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의 의미야. 황창랑이 처음 시전한 후 바로 백제의 왕을 죽이는 데 썼던 이 검법이네. 천명(天命)을 타고 태어난 왕이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죽일 수 있다는 기백(氣魄)이 서려 있는 거지. 그래서 역대 우리 신라왕들도 이 본국검법의 계승자(繼承者)에겐 절대 함부로 대하지 못했네. 그것이 바로 나라를 구한 황창랑에 대한 예의이자 계승자가 가지고 있는 본국검법의 '자룡검' 에 대한 경외(敬畏)이기도 했기 때문이야. 만일 후세에 백제든 신라든 혹은 어느 나라든, 나라를 어지럽히고 백성을 괴롭히는 자가 있다면 마땅히 지하에 있는 황창랑의 이름을 걸고 설령 그가 왕일지라도 당당히 찌를 수 있는 검. 그것이 바로 이 본국검법이야."

“그, 그런 일이..."

낭파는 노인이 너무도 엄청난 일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에 그만 질려서 힘없이 속삭였다.
왕을 죽인다는 것. 그것은 비천한 일두품 평민인 낭파는 고사하고 귀족이나 왕족이라도 감히 입에 올리거나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었다. 그런데 노인의 말에 따르면 본국검법을 익힌 계승자에게는 그럴 권한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단지 하나의 검술을 배우는 것만으로 그러한 것이 가능하다니.
낭파는 알 수 없는 두근거림으로 다가왔던 본국검법이 어째서 그렇듯 묘한 매력을 풍겼는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부모의 원수에 미쳐서 다만 늑대를 베는 것과 지금 어지러워지고 있는 나라를 보고 그 검으로 나라를 망치고 있는 간악한 자를 베어 천기(天氣)를 바로 잡는 것. 둘 중 어느 걸 택할 건가? 낭파."

낭파는 노인의 얼굴에 떠오른 한줄기 근심이 무엇을 뜻하는 지 알 수 있었다. 늑대 떼를 천벌이라 칭하며 죽음을 재촉하는 미친 노인이라 생각했는데 그건 커다란 착각이었다. 오히려 이런 조그만 마을 촌장으로는 아까운 인물이라 생각될 정도였다.

“왜? 나에게..."

그러나 낭파는 알 수 없었다. 그토록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천기까지도 볼 수 있는 그가 이렇듯 허무하게 죽으려 하는가? 어째서 다른 좋은 신분과 뛰어난 자질을 가진 사람이 아닌, 늑대를 죽이는 것을 유일한 업(業)으로 삼는 자신에게 본국검법을 배우라고 하는가?

“왜 나에게 이렇게 집요하게 그것을 권하는 거지? 나 같은 미치광이에게 그러한 고귀한 검법이 어울리게 보인단 말인가?"

“우습군. 검을 휘둘러 사람도 아닌 늑대를 베던 자네가 검법에 고귀하다는 말 같은 걸 붙이다니. 방금 전 내가 말한 모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본국검법 그 자체가 귀하다거나 혹은 높은 철학이라도 가지고 있을 듯 싶은가?"

노인은 아직도 의심하는 표정의 낭파를 늑대에게서 구해질 때와는 입장이 바뀐 듯 거꾸로 우습다고 칭하며 비웃었다.

“물론 세상에는 많은 검법이 있지. 하지만 제 아무리 음양의 조화이니 신성한 영물의 모양을 하여 정기(精氣)를 품으니 하고 떠들어도 검법이란 결국 사람을 죽이기 위한 기술이야. 본국검법도 따지고 보면 검을 가지고 흥이 나서 추는 이름 없는 춤이었을 뿐이고 말이야. 혼자서 신이 나서 추는 춤에 어떤 깊은 사상이 있으며 그러한 춤으로 사람을 죽일 때 어떤 높은 철학이 그 안에 있을 수 있단 거지?"

“그건 조금전과 말이 다르지 않나?"

“자네는 늑대를 죽일 때 아무런 형(型)도 없이 무조건 분노에 싸여 검을 휘둘렀지만 결과적으로 늑대를 모두 죽였네. 본국검법도 그런 이름 없던 형태중 하나야. 그런 것을 귀족이니 화랑이니 하는 귀한 핏줄만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으음..."

낭파는 노인의 말에 날카로운 가시에 찔린 것처럼 움츠렸다. 여태까지 그가 품어왔던 일종의 체념적 한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이대로 그냥 늑대를 죽이며 낭파(狼破)라는 이름을 끝까지 고집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노인이 말한 대로 풀리지 못할 분노를 영원히 늑대라는 대상에게만 발산하며 살육을 하는 미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만일 정말 부모님을 해친 그 늑대가 단순한 굶주린 야수가 아닌 천기에 의한 저주의 소산이라면 차라리 그러한 현상을 만든 사람들을 베어야 하지 않겠는가? 낭파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늑대들에 의해 살점이 모두 발려진 채로 뒹굴고 있던 참혹한 시체의 영상이 그의 눈앞에 떠올랐고 그것은 이어서 뜨거워지는 그의 눈동자에서 눈물에 의해 번져갔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모두..."

몇 방울의 눈물이 그에게서 떨어졌다. 잊을 수 없던, 자신을 여태 지배하던 그 모습을 그는 이제 그 눈물로 지우려 하고 있었다. 낭파는 흐르고 있는 눈물에 비는 듯 속삭인 후 다시 고개를 들었다. 다시 꽉 쥔 그의 오른손에서 검날이 푸르게 빛났다.

“본국검법을 배우겠습니다."

마치 하늘에 대고 말하는 듯한 맹세. 낭파의 눈물이 어려 있는 눈동자에 노인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모습이 비쳤다.
낭파는 미소를 지었다. 아니, 미소를 지으려고 했다. 그 동안 그를 묶어 왔던 늑대의 환영에서 해방되어 한 사람으로 살아가려는 그를 감싸듯 조금씩 주위가 밝아져 왔다. 모닥불은 이미 꺼져 있었다.

“이제 곧 왕께서 직접 주관(主觀)하시는 무술대회가 열릴 거야."

“무술대회라고?"

“본국검법은 황창랑 이후로 지금까지 화랑들이 반드시 익혀야 하는 화랑검법으로 이어져 내려왔지만 그것은 전장에서 싸울 때를 위해 간략화 되고 생략된 형태일 뿐 진정한 비기(秘技)와 위력을 지닌 검법은 오로지 한사람에게만 전수되고 있어. 그 계승자야말로 진정한 본국검법을 익혔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지. 지금 그 계승자는 상당히 나이가 많아 검을 쥐기조차 힘든 나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계승이 되지 않고 있지. 마땅히 본국검법을 전수 받을 수 있는 인재(人才)가 없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을 정도야."

“그것이 무술대회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지?"

환하게 밝아오는 빛 속에서 낭파는 노인이 들려주는 말을 들었다. 그는 눈물을 흘렸었지만 그 눈물은 그저 바보같이 쏟는 무력한 눈물이 아니었다. 미칠 정도로 집착했던 하나의 집념(執念)을 씻어 버리고 다른 결심을 하기 위한 준비였다. 살짝 떨군 몇 방울의 눈물 이후로 그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아직도 모르겠나? 이 말은 이때까지 주로 본국검법의 전승자가 되어 왔던 귀족과 화랑들이 삼국이 통일된 지금의 시대를 맞아 나약해졌다는 거야. 힘든 무술보다는 문(文)을 선호하게 되었다는 거지. 그렇지 않다면 정말로 인재가 없어서 그런 말이 나오게 된 것이라 생각하나? 전부 겁내고 있는 거야. 명예와 출세는 바라지만 그 대가로 요구되는 고통과 위험 같은 건 싫다는 거지. 폐하께선 바로 이것을 염려하셔서 직접 무술대회를 열고 이 대회에서 우승하는 자에겐 나이와 골품에 상관없이 화랑 칭호와 본국검법 계승자 자격을 부여하겠다고 하신 거야."

“그런가?"

삼국통일 이후 신라는 통일이전의 수많은 국가적 위험과 어려움을 겪으며 강조되어온 화랑도(花郞道)와 무(武)의 기조(基調)가 쇠퇴하고 있었다.
긴장이 풀린 탓이었다. 비록 당과의 관계가 아직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건 얼마전 서로 전쟁을 치른 일로 인해 서먹한 정도 일 뿐 심각한 대립이 아니었다. 해안 지방을 침범해 온 왜(倭)의 세력이 괴롭기는 했지만 해적의 노략질에 불과한 것으로 큰 위협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자네가 조금 전 늑대와 싸우던 기세를 가지고 출전한다면 세련된 무술이나 검법 같은 것은 모르더라도 능히 그 기세만으로도 이길 수 있을 거야. 물론 그런 경우의 승부란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만일 우승하지 못한다면?"

“우승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아마 다시 평범한 늑대 사냥꾼으로 돌아가야 하겠지. 하늘은 둥글고 운명은 항상 서로 다른 이면(裏面)을 가지고 있는 법이니까."

“이면?"

노인의 표정에 순간 약간 슬픈 기색이 스쳤다. 그것이 이야기한 대로 그 운명이라는 것의 이면성 때문인지 아니면 스스로 천기(天氣)를 읽으면서도 그것을 마음대로는 할 수 없는 무력감 때문인지는 몰랐다. 다만 그 목소리에 스며있는 허무감과 슬픔이 낭파의 귀를 통해 마음까지 전해져 왔다.

“그렇다면 그 말은 나에게 본국검법을 배우려면 어떻듯 반드시 그 무술시합에서 이기라는 말이군."

낭파는 그러나 그 허무감과 슬픔이 자신의 마음속까지 물들게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단칼에 자르듯 말했다. 시작은 노인의 권고였지만 일단 본국검법을 배우기로 마음먹은 이상 이제 남은 것은 스스로의 강력한 의지로 그 방법을 향해 나아가는 것뿐이다. 다른 생각이 있을 수 없고 망설임 또한 불필요했다.

“물론이지. 자아, 이제 날이 밝았어. 나는 이만 가봐야겠네. 어제 자네를 만난 것이 운명이었다면 이제 다시 어디론가 가야하는 것도 운명이니까."

“또 그 멍청한 운명이니 천벌이니 하는 타령인가? 그 이야기라면 그만해둬! 운명과 천벌로 결정지어지는 것이 세상이라면 나는 그런 세상을 통째로 깨버리든가 내가 죽든가 하나를 선택할 거야."

“부디 그렇게 되기를 바라겠네.”

노인은 일어서며 낭파를 향해 미소지었다.
낭파는 꺼져서 이제 연기만 나고 있는 모닥불에서 떠나 걷고 있는 노인에게 잘 가라는 인사말도,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않았다. 너무도 짧았던 하루 밤의 시간이었다. 온통 어두웠고 또한 답답했던 그 시간과 공간 속에서 모닥불 하나를 두고 신라와 본국검법에 대해 이야기해주던 그가 아주 친근한 존재로 생각되었다. 분명 노인은 잠시 어디를 다녀오려는 것이다. 언제든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런 편안한 마음속에서 낭파는 일말의 불안감을 느꼈다. 지금 노인이 향하고 있는 방향은 마을사람들이 도망친 방향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전에 늑대가 도망갔던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그는 지금 어디로 가는 걸까?

“가는 건가? 언제 또 만날 수 있겠지?"

큰소리로 묻는 낭파에게 노인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크게 소리쳤다.

“천기(天氣)가 그것을 가능케 한다면! 물론 의지를 우선하는 자네는 이것을 믿지 않겠지. 하지만..."

그리고 노인은 마지막에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곧 얼버무리고 걸음을 빨리 했다. 그가 서서히 낭파의 시선에서 멀어졌다.
낭파는 ‘하지만’ 이란 말 뒤에 노인이 하려 한 말에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노인이 사라지자 그제야 아직 그 노인의 이름조차 알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놀라고 말았다.



노인은 낭파가 전혀 그를 볼 수 없는, 그리고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곳에 있었다. 숲 속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이미 눈치채고 있는 듯 말했다.

“이제 됐다! 나와라!"

그러자 곧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나며 노인의 주위에서는 어디선가 나타난 늑대들이 무리를 이루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들의 눈동자는 탐욕스럽게 피와 죽음을 구하고 있었다. 노인은 잠시 흠칫하며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곧 자세를 바로 하며 그 자리에 참선(參禪)이라도 하는 것처럼 앉았다.

“역시 기다리고 있었구나. 그 동안 기다려 줘서 고맙군.“

노인은 마치 사람도 대화하는 듯 늑대에게 말했다.

“어떤 사람에게 천기란 단순한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겐 도망칠 수 없는 운명이 된다... 나 같은 노인에겐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죽음과 같은 구속(拘束)이었나 보군. 자, 마음대로 해라!"

늑대들이 일제히 노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떠오르는 아침 햇빛도 미치지 않을 만큼 울창한 숲이었다. 노인은 늑대들이 보여주는 잔상을 보고 있었다. 선명한 회색의 그 잔상 속에는 하얗게 빛나는 점 같은 것이 숨어 있었다. 하얗고 날카로운 어금니... 그것이 죽음을 안고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천기. 내가 아무리 애써도 바꿀 수 없었던 그것을 낭파는 바꿀 수 있을까? 사람이 운명을 지배하는 것과 운명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 어느 것이 맞을까?"

맨 처음 달려든 늑대의 이빨이 목을 물어뜯을 때까지 노인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후 노인은 이제 운명이 아닌 죽음이 자신의 몸을 지배했음을 느꼈다. 그는 편안한 느낌에 모든 것을 잊었다.



“폐하, 아무래도 귀족들의 반응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특히 상대등(上大等)은 노골적으로 이번 무술대회의 참가 자격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시중의 말을 듣고 있던 왕이 노기가 치솟아 오르는 얼굴을 감추지 않고 소리쳤다.
금성의 왕궁 안이었다. 여기서 집무(執務)를 볼 때 왕은 될 수 있으면 어떤 일에도 사사로운 감정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이를테면 전주의 거사물정에서 옛 백제계로 보이는 무사들에 의해 소규모의 반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혹은 무주의 미다부리정이 깊숙이 쳐들어온 왜구에 의해 노략질 당하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도 그랬다. 그는 냉정한 얼굴로 ‘곧 군사를 파견하라’ 라든지 ‘그곳 총관에게 연락해 퇴치(退治)토록 하라’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직접 지시한 무술대회가 귀족들에 의해 제지당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그만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번 무술대회는 짐이 직접 지시하고 공포한 어전(御前) 대회임을 상대등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리 한단 말이냐?"

통일 전 신라의 최고 의결기관은 진골 이상의 귀족들이 참가하는 화백회의였다. 만장일치제를 채택한 이 회의의 의장은 상대등이라 불리며 왕과 대등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전에는 설사 왕의 의사라고 해도 상대등이 반대한다면 화백회의에서 그 문제가 논의되어 거부될 정도였다.
그러나 무열왕 이후 화백회의는 강한 중앙집권적 왕권 강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행한 교묘한 제도변경으로 인해 유명무실해져 있었다. 지금은 모든 국사를 왕과 왕이 임명하는 측근인 시중이 논해 행하고 있었다. 이에 소외되어 가고 있음을 눈치챈 귀족들이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등의 말에 따르면 이번 대회에는 신분의 제한 없이 아무리 낮은 신분이라도 참가가 가능하다고 되어 있는데, 귀한 신분인 진골 귀족 자제들이나 명예로운 화랑들이 만일의 경우 고작 소, 돼지를 잡는 화척(백정)과 검을 나란히 하고 겨루는 일이 벌어져서야 어디 그것이 어전 무술대회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상대등이 그런 말을 했단 말이냐?"

“예, 폐하."

시중이 말을 마치고 날아들 왕의 노기를 생각하고 그만 조금 고개를 움츠렸다. 그는 업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선 상당히 뛰어난 인물이었으나 다부진 면이 없이 소심했다. 선대의 무열왕은 그런 점이 오히려 왕권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시중으로 임명한 것이다.

“그래... 상대등이 그랬단 말이지."

왕은 시중의 예상과 달리 더 이상 노성(怒聲)을 지르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생각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사실 그가 아무리 화가 났고 지금 화백회의가 이름만 있는 존재라 해도 상대등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아직도 엄연히 상대등은 시중과 함께 왕 다음가는 지위를 가진 권력자였고 귀족을 대표한다는 그의 상징성 역시 대단했다. 통일 후 넓어진 식읍(食邑:귀족에게 주어지는 사유지)으로 인해 풍요해져 나태해졌다고 하나 귀족들이 불만을 느끼고 뭉쳐서 왕을 탄핵(彈劾)하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이제 안정을 찾아가는 신라의 왕권에 또 다른 위협이 될 것이다.

“할 수 없지. 준비해라, 시중."

“예? 폐하. 무슨 준비를 말씀하시는 건지... "

“지금 상대등을 만나러 가겠다! 아무래도 짐이 직접 그를 설득해야겠다."

화려한 화술(話術)과 명석한 판단력에 따른 탁월한 외교력으로 이름을 떨쳤던 선왕이자 아버지인 무열왕 김춘추. 그의 피를 이어 받은 법민이었다.
왕은 머리 속으로 상대등을 만나 주고받을 말을 구상하며 옥좌에서 일어났다.

“폐하! 정말로..."

상대등 박평(朴平)은 그의 처소에서 문무왕과 마주 앉았다.
야심(夜沈)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어둠이 짙게 깔린 밤. 주위의 모든 사람을 물리친 가운데 벌어지는 단독대면(憺對面)이었다. 화술에 능했던 선왕 무열왕은 중대한 문제에서 신하들을 설득할 필요가 있을 때 종종 이러한 방법을 취했고 그때마다 성공적인 결론을 냈다. 그래서 문무왕도 같은 방법을 취한 것이었는데 상대등은 의외로 강경(强硬)한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귀족들이 나약해져서 더 이상 쓸모 없다고 여기십니까?"

더구나 지금 그는 왕이 고민하고 있는 무술대회가 나타내고 있는 목적을 바로 간파하고 있었다.
본래 무술대회는 출전자격이나 입상에 있어서 제한이 있는 가운데 열려왔다. 그 때문에 항상 우승자는 귀족과 화랑이었고 그를 바탕으로 계속되어온 것이 신라의 군(軍)과 장(將)의 체계였다. 그러나 문무왕은 이런 일종의 전통을 부정하고 신분 차별 같은 것을 두지 않는 대회를 직접 발표한 것이다. 이제까지 통일과정에서 상당히 나름대로 희생을 무릅쓴 귀족-특히 화랑-을 믿는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상대등의 논리였다.
왕은 그런 상대등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상대등은 어느 정도 명석한 두뇌를 가졌으나 스스로와 귀족층의 안위를 위해서 그 두뇌를 쓸 뿐이었다. 그 때문에 귀족들에게 신뢰를 받아 벌써 십 년 가까이 상대등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선왕으로부턴 '옹졸한 자' 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나약해 졌다고 대답할 필요조차 없소. 도대체 요즘 귀족들이 하는 일이 무엇이오? 당의 침입도 수그러들었고 왜구 정도는 걱정하지 말라는 말만 되풀이 할뿐 결국 이 상태에서 안주(安住)하자는 것 아니오? 실제로 가장 어려운 것이 남아있음에도..."

“그건 사실입니다. 분명 이제 어느 정도 숨을 돌리자는 뜻의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너무도 쉽게 잊고 간과(看過)하고 계신 것이 있습니다!"

왕의 노기(怒氣)가 섞인 말에 대해 상대등은 굽히지 않고 맞섰다. 왕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왕이 원하는 것은 통일되는 과정에서 보여준 용기와 희생을 보다 어려운 지금의 삼국 융합(融合)을 위해 보여 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 달라는 것은 왕의 독선(獨善)이라는 것이 대다수 귀족들의 의견이었다.

“이미 귀족들의 자제인 수많은 화랑이 삼국통일을 위한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당과의 전쟁에서 희생되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통일이 마무리에 접어든 지금은 더 이상 아무도 예전과 같은 슬픈 희생으로 아들을 내몰려고 하지 않습니다. 모두 안정을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을 단순한 안주라고 보시는 지요. 태대각간(太大角干:김유신의 관직명)의 아드님이었던 원술랑 마저 희생된 그러한 일이 반복되길 원하십니까?"

“그것은..."

원술의 일이 언급되자 왕은 잠시 멈칫했다. 무열왕 김춘추와 친구 사이였고 그가 없는 신라는 있을 수 없다는 말을 듣던 김유신. 문무왕에겐 마치 부모와도 같았던 김유신의 아들 원술은 다만 임전무퇴(臨戰無退)라는 화랑의 세속오계를 어겼다는 이유로 이후 전쟁에 공을 세우고도 결국 중이 되어 태백산으로 들어가 쓸쓸한 최후를 마쳤다. 이것은 너무도 쓰라린 일이었다.

“짐 역시 슬프게 여기고 있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금 귀족들이 나약해져 가고 있는 것이 그것으로 용납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비록 이제 위협이라고 해봐야 당 황제의 체면치례 정도인 외교적 공세밖에 없고 왜의 침략이 걱정인 정도라 하지만 최근 화랑이 되고자 하는 귀족의 자제들이 현저히 줄고 있소. 앞으로 신라의 기둥이 되어야할 그들이 책임을 기피하고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지 않소?"

“그것은 폐하의 잘못된 생각이십니다. 일부 귀족들이 화랑으로 아들을 내놓기를 꺼리는 일은 있을 지 몰라도 전체가 그런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좋소! 그렇다면 상대등의 그 말을 일단 인정하겠소. 전체가 나약해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럼 한가지 묻겠소."

김유신 이후, 무(武)를 선택한 장수로 권력을 가질 수 있는 벼슬에 오른 이는 없었다. 때문에 귀족들이 무(武)를 기피하는 현상을 암암리에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일단 부정하는 상대등 박평에게 일타(一打)를 가하기 위해 왕은 드디어 심중에 있던 한마디를 꺼냈다.

“본국검법의 전승자를 오랫동안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지원자가 나타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이오? 이미 선대의 전승자가 늙어서 곧 세상을 떠날지도 모를 병약한 몸인데도 아무도 그것을 전수 받겠다고 나서지 않고 있지 않소?"

본국검법의 전승자. 이 말에 상대등은 입을 대답하지 못했다. 비교적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변명에 능한 그로서도 할말이 없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본국검법은 그것을 익히는 자에게 대단한 영광과 함께 왕에게 죄를 물을 수 있는 상징적 의미가 있음을 모두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피나는 수련 끝에 그것을 모두 터득해야만 했다. 일반적으로 화랑들이 실전을 위해 배우는 간략화된 화랑검과 달리 본국검법의 계승이라고 불리는 그것은 수 십년이 걸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면 평생 그 방법만을 알고 있을 뿐 터득하지는 못하는 상태의 계승자로 머물 수도 있었다. 그런 경우는 제대로 된 계승자로 여겨지지도 않았으며 다음 계승자를 빨리 찾아내야만 했다. 어려운 과정이었다. 편안히 벼슬길에 나아가 얻을 수 있는 영예를 일부러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시도할 귀족은 이제 없었다.

“그렇게 물으시면 그 점에 할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황창랑의 그 유서 깊은 검법을 자칫하면 어느 신분도 모르는 천민이나 화척에게 내주시렵니까?"

“그러면 그것이 두려워 아예 황창랑의 검법을 화랑검으로만 놔두고 대를 끊자는 말이오?"

“폐하!"

상대등이 이제 수세(守勢)에 몰리고 있었다. 원래 명분도 약한 것이 사실이었지만 그로서도 왕이 이 정도까지 강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무열왕조차도 겨우 한가지 사안을 가지고 상대등의 반대에 대해 이처럼 강하게 나온 적은 없었다. 오히려 무열왕은 한가지를 양보하고 한가지를 따내는 식으로 그의 장기인 협상(協商)의 화술을 발휘했었다.

“신은 폐하께서 왜 그리 본국검법 계승을 원하시는 지 알 수가 없습니다. 드러내놓고 말하기는 뭣하지만 지난 동안 본국검법이 지니는 그 상징적 의미와 무술로서의 가치에도 불구하고 선왕들께서 그 '자룡검' 자격에 심히 반발하셨던 것은 이미 아시지 않습니까?"

“흠... 그것이 기분 나쁜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상징적 의미라고 짐은 보고 있소. 게다가 만일 스스로 선왕과 하늘을 우러러 큰 후회가 없도록 치세(治世)를 폈다면 그것이 두려울 것은 뭐 있겠소? 오히려 내가 두려워함은 다른데 있소. 그런 상징적인 것조차 모두 폐(閉)하고 백성과 떨어진 채로 망국의 유흥을 즐길 왕이 후대에 나오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요."

아직 비록 정정하다고는 하나 다가오는 늙음의 표시를 채 지우지 못하는 왕의 얼굴이었다. 비장한 어조의 목소리가 '후대'를 걱정하는 말과 함께 나오자 어지간한 상대등도 더 이상 반대하기 어려웠다. 왕의 천수(天壽)가 얼마 남지 않았음은 요즘 그를 가까이 보는 신하 누구든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폐하..."

옹졸하다는 말을 듣던 박평이지만 기본적인 충(忠)마저 모르는 신하는 아니었다. 그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왕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이제 어디로 가지?”

아침을 맞은 낭파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노인을 떠나 보내고 난 후 그는 마땅히 갈곳이 없었다. 전에는 늑대를 죽이기 위해 그들을 쫓아 움직였다. 지금 그것을 포기하고 난 후 가장 커다란 목적을 그는 잃고 있었다.

‘검...'

오른 팔에 들려 있는 검이 한동안 아무 필요도 없으리라 생각하면서도 그는 습관적으로 검을 들어 쳐다보았다. 철(鐵)로 만든 단순한 모양의 이 쇳조각을 휘두름으로서 모든 것이 바뀔 수 있다니. 믿기 힘든 일이었다. 어떻게 보면 지난밤부터 지금까지 긴 꿈을 꾼 것 같기도 했다.

‘꿈이라...’

꿈이라면 또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몇 번이고 꾸어오던 꿈들. 낭파가 역시 사냥꾼이었던 아버지와 지내던 추억이었다.

- 저걸 봐라.

함께 나가던 사냥길에서 낭파의 아버지가 가리킨 것은 얼어죽은 늑대의 시체였다.

- 늑대가...

아직 어린 나이였던 낭파는 그만 눈을 가렸다. 비록 좋아하지 않는 짐승이었지만 얼어죽어 있는 모습은 참혹했다. 군데군데 살점이 뜯겨나가 있기도 했다. 아마도 지나가던 맹수나 같은 늑대에게 뜯어 먹힌 것이리라.

- 다른 동물을 죽이며 사는 짐승도 결국은 죽는 법. 그리고 죽은 뒤에는 그도 먹히는 법이다.

낭파의 아버지는 자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건 결국 같은 섭리에 따라 살게 된다. 동등하다는 거다.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셨지. 부처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다고.

-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열심히 생각하던 낭파는 고개를 저었다.

- 실제로 나라에는 왕이 있고 귀족이 있고 각자 귀천이 있잖아요?

- 물론 그렇지. 그러나 그건 말이다.

낭파의 아버지가 손에 들고 있는 활을 가리켰다. 그것은 사냥을 위한 중요한 도구였다.

- 이 활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만든 인위적인 것에 지나지 않다. 활이 있어서 짐승을 잡기 편한 것과 마찬가지로 나라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 거야.

- 왕이나 귀족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말이에요?

-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때가 되면 죽는 단다. 누구도 그걸 피해가지 못하지. 저 늑대와 같이 말이야.

- 그럼 사람과 짐승도 차이가 없잖아요?

- 얼핏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사람과 짐승은 분명 다르다. 그 차이는 네가 좀더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다.

사냥할 때의 눈빛과는 달랐다. 적어도 낭파에게 그때 아버지의 눈은 다르게 비쳤었다.

‘난 여태까지 짐승과 다를 바 없이 살아왔다.’

긴 시간동안의 꿈. 몸에 밴 피 냄새가 조금씩 옅어졌다. 어쩐지 지금의 상황조차 꿈으로 느껴졌다. 황창랑이 실제로 있었는지 본국검법이란 게 정말 있는지... 그것도 모두 꿈일지 모른다.
하지만 꺼져 있는 모닥불의 재는 분명히 보였다. 그리고 낭파가 들고 있는 피묻은 검의 광채가 선명했다. 낭파는 다시 한번 노인의 말을 생각했다.

‘일단... 금성으로 가자.’

무술시합이 열린다면 분명 금성에서 열릴 것이다. 왕이 있는 금성은 신라의 수도였고 지금은 통일신라 전체의 수도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평범한 사냥꾼으로 산골에 살다가 늑대만을 죽여온 그는 한 번도 금성에 간 적이 없었다.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 낭파는 약간의 두려움을 느꼈다.

‘그곳에서 때를 기다리는 거다.’

하지만 낭파는 이미 결심을 굳혔다. 피를 닦았던- 노인이 건네주었던 명주옷을 집어들어 한참동안 그것을 보았다. 어쩌면 노인이 낭파를 사람으로 봐주었던 그때 이미 늑대를 죽이는 자로서의 낭파는 사라졌던 것일지도 몰랐다. 닦아낸 붉은 피가 배어 있는 그 옷 속에서 낭파는 스스로의 '운명'을 볼 수 있었다. 운명 따윈 없다고 소리쳤었던 그가 운명을 보고 있는 것이다.
바람이 불었다. 낭파는 말없이 그 명주옷을 그 바람 속에 던졌다. 검과 몸을 추스른 후 펄럭거리며 날아가는 그 옷자락을 뒤로하고 낭파는 금성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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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플연재는 여기까지입니다. 만월의 나라는 현재 구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대형출판사나 인터넷 서점 등에서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 안병도 -


* 안병도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4-07-17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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