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eautiful ones *  *  
  Talking About  :  [출간서적 맛보기] 사이버고스트 -뱀파이어의 탑-
  Name  :  안병도     * Go 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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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머리에
                      - 영체이론 -
21세기 초의 세계가 20세기말의 세계와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숫자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거기에 어떤 목적이라도 두려고 하지만 실제로 움직이는 모든 변화와 발전은 사람들의 상징성을 따라 주지 않기 때문이다. 1999년의 고양이와 2001년의 고양이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변하는 것은 숫자를 믿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담긴 세기(世紀)라는 관념뿐이다.
물론 눈부시게 발전하는 것이 있다. 바로 과학기술이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해 그것이 다시 정보혁명으로 발전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인간이 원숭이에서 진화한 기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짧으며 그로 인해 변화한 인간의 생활모습이란 기적에 가까울 정도다. 우리는 지금 우주로 탐사선을 쏘아 올리고 핸드폰을 쓰며 유전자의 구조를 안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과학으로 인해 만물의 영장이 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하지만 과학의 급격한 발전은 대부분 인간의 환영을 받기보다 두려움과 분노를 동반했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지동설은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부정당했으며 증기기관으로 인한 자동화는 기계에 일자리를 빼앗긴 수많은 실직자들의 분노를 샀다. 원자력의 발견은 그 가공할 힘에 의한 지구파멸의 공포를 불러왔으며 유전공학은 생태계의 파괴와 인간복제라는 윤리적 논란을 일으켰다.
그렇지만 과학은 발전한다. 특히 현대과학은 인간의 필요성보다는 그 상업적, 군사적 이용 가능성에 의해 발전한다. 최초의 컴퓨터 애니악과 인터넷의 원조인 알파넷은 순수한 군사적 필요성에 의해 생겼으며 생물과 균주의 복제실험은 의학발전을 가장한 상업적 필요성에 의해 윤리를 무시하고 이루어진다. 요컨대 권력과 돈을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 과학은 언제나 변질되고 위험한 방향으로 튀어나간 것이다.
영체이론(靈體理論), 혹은 ‘Ghostron 이론’이라 부르는 특수한 학문 역시, 그 시작은 매우 순수한 탐구심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그 발전과정에서 개입한 사람들이 모두 그런 순수함을 유지한 건 아니었다. 원자물리학과 유전공학이 그랬듯이 영체론 역시 군사적 목적에 집착한 군 관계자와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업가, 정치적 신념을 가진 테러리스트와 명예에 굶주린 이상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야심을 가지고 달려든 사람들에 의해 재단되고 변형되었다. 따라서 그 나중의 모습은 본래의 모습과 너무도 큰 차이가 있었으며 그것 역시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의 세례를 받은 새로운 학문이 즉각 인류에게 그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냈다는 사실은 별로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런 원칙에도 불구하고 영체이론이란 학문과 그 부수적 파생물이 또 한번 인류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만은 분명했다. 왜냐하면 이 영체이론은 20세기의 모든 과학이 미지의 영역으로 놓아두며 부정했던 초자연적 형상을 설명할 수 있었으며 이론과 실험을 통해 그 실재를 입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영체이론이란 무엇이며 이것은 가져온 결과는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내가 지금부터 쓰고자 하는 긴 이야기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어떤 과학자가 남긴 말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그의 이름은 잊었지만 이 말만은 항상 내 마음 속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신과 악마가 내려오고 지상에서 인간의 사념들이 네트워크를 빛의 속도로 달리는 시대. 혼돈된 입자와 파동 속에서 인간의 가치관과 영혼마저 디지털 신호로 변해 메모리에 저장되는 날. 우리의 꿈은 어디서 그 추악하고도 아름다운 얼굴을 내밀고 있는가?>


             제 1 장  징후(Indication)

                   - 의문의 방문자 -
1933년 12월 4일. 겨울을 맞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있는 교수 한 명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알버트 아인슈타인. 광양자설과 특수 상대성 이론을 연구하고 일반 상대성이론을 발표한 천재로서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과학자다. 유대인 출신인 그는 유대 민족주의, 시오니즘 운동의 지지자였으며 나중에는 평화주의자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지금 그는 독일에서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유대인 추방이 시작되자 독일을 떠나 막 미국에 온 참이었다.
그런 그에게 낯선 방문자 한 명이 면담을 신청했다. 보통의 손님이라면 별로 색다를 것도 없다. 아인슈타인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비단 일반 과학자 뿐 아니라 각계의 유명인사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손님은 달랐다. 그는 구체적인 방문목적을 밝히지 않고 그저 중요한 과학적 문의를 하고 싶다고 했다.
창문 밖에는 비가 내렸다. 눈이 내려야 할 겨울임에도 차가운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그 희미한 빗소리 사이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 하나를 들었다.
“들어오십시오.”
문이 열렸다. 이어서 고풍스런 복장을 한 유럽인 한 명이 들어왔다. 전통 있는 귀족집안에서 어느 정도 클래식을 선호하는 거야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이 사람은 그 정도가 심했다. 마치 고전영화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옷차림이었다.
“슈나이더 백작이요.”
백발에 외눈안경을 쓴 방문자는 약간의 독일어 악센트가 섞인 영어로 자신을 소개했다.
“반갑습니다. 제가 바로 아인슈타인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비교적 익숙하게 그를 향해 인사하며 자리를 권했다. 약간의 사소한 대화가 이어진 후 백작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교수는 최근 통일장 이론을 연구하고 있다고 들었소만.”
“맞습니다. 혹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까?”
“물론이오. 나는 과학을 좋아하오. 교수의 상대성 이론과 통일장 이론에도 관심이 있소. 하지만 그보다 나는 내가 연구하고 있는 어떤 원리 하나를 완성하고 싶소. 그것을 위해 교수가 내 생각을 한번 들어보고 의견을 주었으면 해서 온 거요.”
“어떤 것인지 말해 보시죠.”
아인슈타인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당신은 영혼의 본질이 어떤 것이라 생각하오? 혹은 이른바 초자연적인 힘이 왜 존재한다고 생각하시오?”
“그 질문에는 모순이 있군요. 두 가지 질문인데 한 가지 질문인 것처럼 질문하시면 곤란합니다.”
“바로 이 모순이 질문의 핵심이요.”
“이해할 수 없군요. 대답하자면 영혼의 본질이란 과학에서 따질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신의 영역이며 또한 종교의 영역에 있습니다. 또한 초자연적인 힘의 존재는 이미 많은 연구에 의해 부정되거나 기존의 과학적 힘의 오해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영혼을 핵이나 전자로 분석할 수 없고 증명되지 않은 초능력을 물리법칙으로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어째서 묻는 겁니까?”
“혹시 당신은 그것 뒤에 어떤 법칙이나 원리가 숨어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소?”
“도대체 거기에 무슨 원리가 있단 말입니까!”
아인슈타인은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후훗.”
슈나이더 백작은 엷게 웃었다. 예상하고 있다는 반응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말했다.
“천문학이 발전하지 못한 옛날에 사람들은 일식이나 월식을 신의 진노와 권능이라 생각했지요.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오히려 바보가 되고 있지 않소? 신의 영역이란 것은 역설적으로 따지면 우리가 아직 그 원리를 밝혀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것일지 모르지 않소. 여기서 만일 한 가지 재미있는 상상을 해 본다면 어떻겠소?”
“상상이라고요?”
아인슈타인은 얼굴을 약간 찌푸렸다.
“간단하지요. 즉 우리가 여태 믿어왔던 모든 초자연적인 현상, 그러니까 당신이 말한 초능력이나 혹은 고대에 존재한 마법 등이 실은 어떤 증명되지 않은 미지의 과학적 힘에 의한 것이라 가정하는 거요. 과학으로 충분히 제어될 수 있는 힘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잡혀있지 않기에 무시되거나 오해되고 있는 힘으로 말이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백작의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자 아인슈타인의 말투에는 분노가 섞였다. 이것은 대놓고 과학과 신을 모독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아직은 구체적으로 정립된 학설을 가지고 있지 않소. 또한 나는 과학자가 아니고 실험시설도 없기에 증명해 보일 수도 없소. 그러기에 나는 이런 의문을 품고 그동안 많은 유명한 학자들을 만났소. 심지어는 당신이 전혀 생각하지도 못할 사람들을 만났소.”
“그들이 누굽니까?”
아인슈타인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유렵의 유서 있는 귀족가문에서 왔다고 해서 일부러 연구시간을 쪼개어 틈을 내주었음에도 전혀 형편없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아이작 뉴튼은 내 의견에 일부 수긍했소. 그가 런던에서 연금술에 골몰해 있을 때 찾아갔지요. 반면에 에너지 보존법칙을 정립한 라이프니츠는 부정적이었소. 실험생리학자 뮐러는 기계론적 입장에서 인체생리를 해설하면서도 결국에는 기계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뭔가를 인정했소.”
“당신이 그들을 전부 직접 만났다는 말입니까?”
“물론이오.”
“그만 돌아가십시오. 내가 시간낭비를 한 것 같군요”
아인슈타인은 슈나이더 백작을 단호하게 쫓아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 백작은 엄청난 과대망상자에다 정신까지 이상한 게 틀림없었다. 아이작 뉴튼과 라이프니츠는 17세기 사람이며 지금은 20세기다. 만일 백작의 말이 맞는다면 백작은 무려 300여년을 살았다는 말이 된다.
“당신은 미쳤어요! 나는 미친 사람을 상대할 틈이 없습니다!”
“교수 역시 기존의 과학이란 틀에 갇혀있군요.”
의자에서 일어서며 슈나이더 백작은 다시 말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몸을 반대쪽으로 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마디만 하죠.”
들어온 문을 열고 막 나가려던 백작이 잠시 아인슈타인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상대도 해주지 않았다.
“아직은 나도 혹은 세상의 누구도 모르지만, 장담하건대 21세기가 갓 시작될 즈음이면 이미 그것이 증명될 거요. 그것을 당신이 못보고 죽는다는 게 애석할 뿐이요.”
둔탁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문득 고개를 돌린 아인슈타인은 문득 그 방문자가 책상 위에 남기고 간 물건을 보았다.
“설마...”
아인슈타인은 그것을 집어 들어 자세히 살펴보고는 신음소리를 냈다. 그것은 17세기 영국 왕립학회의 배지였다. 세월의 때가 고스란히 묻은 그 배지는 절대로 가짜가 아니었다. 백작은 일부러 여기에 그것을 놓아두고 간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그 배지의 뒷면을 보았다. 거기에는 ‘아이작 뉴튼’ 이란 회원이름이 작게 새겨져 있었다.
“그가 정말 17세기를 살았다는 건가?”
아인슈타인은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이 머문 창밖으로 학교를 나가는 백작의 뒷모습이 보였다.


                         - K구역 -
2008년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은 서울.
거리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오고 있는 가게들 주위에 데이트를 즐기는 커플과 선물을 사달라고 부모를 조르는 아이들이 싸락눈을 맞으며 걸어 다녔다.
하지만 같은 시간, 서울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삼성역과 무역센터 주변의 모습은 달랐다. 고층 빌딩과 호텔이 밀집해있는 이곳은 경찰과 군대의 삼엄한 경비아래 완전히 봉쇄되었으며 태풍과 지진을 한꺼번에 당한 듯 무너지고 부서진 건물과 시체가 널려있었다.
지금 이곳은 정부에 의해 특별재해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주민은 대피령에 의해 도시외곽으로 피했으며 모든 진입로는 차단되었다. 권총과 진압봉으로 무장한 경찰이 시민들을 상대하는 사이, 헬기와 탱크까지 동원한 군인들이 안쪽에 진입해 경계작전을 수행했다.
“제길.”
머리에 잘 맞지도 않는 방탄모와 무겁게만 느껴지는 총을 든 임유혁 병장이 연신 투덜거렸다. 제대까지 1개월밖에 남지 않은 그는 원래라면 부대 막사에서 짱 박혀 낮잠이나 자고 있을 군번이었다. 그러나 부대 전체에 내려진 출동명령 앞에서 그의 짬밥은 간단히 무시되었다. 그는 갓 들어온 이등병들과 나란히 이유도 모른 채 이 지역을 지켜야했다.
조금씩 어둠이 깔리는 시간. 시계는 오후 5시 반을 가리켰다.
투다다다!
헬기가 머리 위로 스칠 듯이 지나갔다. 아까부터 주기적으로 맴도는  것이, 아래에 있는 우리가 제대로 졸지 않고 근무하나 살피는 용도가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겨우 20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비행고도가 그것을 증명해주는 듯 했다. 물론, 헬기에게 그따위 임무나 맡길 정도로  국군이 돈 많고 여유작작한 군대는 아니지만...
여기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모두는 당연한 의문을 품었지만 그 답은 아무도 내놓지 않았다. 신문과 텔레비전을 포함한 모든 매체는 보도관제되었고, 그나마 방송되는 정부당국자의 공식 발표는 며칠 전 해당 지역에서 심각한 국지적 지진이 발생했으며 뒤이어 더 강한 위력의 지진과 자연재해가 우려된다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환태평양 지진대에서 벗어난 한국은 역사상 이 정도로 강력한 지진을 겪은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설사 정부 발표대로 그런 커다란 지진이 일어났다 해도 그 원인에 대해서 어떤 납득이 가는 설명도 없었다. 베일에 싸인 K구역(이 지역을 봉쇄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국방부가 붙인 가칭) 사건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말들이 흘러나온 것은 당연했다.
가장 믿을 만한 소문은, 얼마 전부터 K구역에 ‘그것’이 출현했다는 것이었다. 가장 믿을만함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인간이 여태까지 그 존재조차 부정해온 것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정체가 무엇인지는 물론이고 도무지 형체조차 알 수 없는 것들이 나타나 닥치는 대로 인간을 해치고 건물을 무너뜨렸다. 이것을 견디지 못한 정부가 그곳을 막고 모든 정보를 통제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름대로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그들은 ‘그것’을 과학적인 어떤 것이라고 주장했다. 과학에 의해 잘못 만들어진 실험체라는 주장이었다. 심지어 ‘그것’을 극초소형 핵무기라고 주장하는 자도 있었다. 미군에 의해 잘못 발사된 소형 핵폭탄이 K지역 중앙에 있는 최고층빌딩 ‘스카이랩’을 직격했다는 말은 군사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가능성 높은 가설로 꼽히고 있었다. 잔류방사능이 없다는 점을 빼면.
어쨌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단 하나,. K지역은 봉쇄됐으며 특별한 허가 없이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눈이 소복이 쌓여 화이트 크리스마스이브가 되어 서울 전체가 들떴지만, 이 지역만큼은 미칠 듯한 긴장감과 고요함만이 감돌았다.
“제길... 지진이라면 굳이 우리가 출동할 필요 없잖아. 안 그래?”
임유혁은 장갑차 뒤쪽에 있는 이윤수 이병에게 말을 걸었다. 근무중 잡담은 금지였지만 그런 거라도 못하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뒤쪽에는 경찰이 둘러싸고 있고 여기엔 저렇게 헬기도 떠있어. 어떨 때는 전투기도 오잖아? 지진이라면 소방대, 119구조대 같은 애들이 나와야지. 무슨 전쟁이라면 몰라도... 지진이 났는데 장갑차나 헬기, 우리같은 군바리가 왜 필요해?”
“명령이잖습니까.... 게다가 여긴... ‘그것’이...”
까마득한 짬밥 차이 때문에 이윤수 이병은 임유혁에게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더듬듯이 말했다. 임유혁은 굳어진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께 밤 잠실역쪽을 경계하던 소대 하나가 정체불명의 어떤 것들에 의해 습격당해 부대원 전체가 몰살당했다. 갈기갈기 찢겨진 시체와 낭자한 선혈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마구 쏘아댄 탄피들의 잔해만 남긴 채 그이상의 어떤 단서도 없는 의문의 죽음이었다.
현장에 출동한 합신반(합동신문반, 군/경 합동수사대)에서도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고민 끝에 사고사로 처리했다. 그야말로 눈가리고 아웅하는 짓이었지만 누구도 이들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보다 높은 상층부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고는 지시만 하는 그들이야 말로 모든 전모를 알고 있을 사람들이었다.
“테러리스트일까...”
혹시 K지역에 특수 테러리스트들이 침투한 게 아닌가 하는 풍문도 흘렀다. 그 테러리스트들이 소대를 전멸시킨 것이 아닐지... 임유혁은 그것이 가장 현실성이 있다고 간주했다. 귀신이나 유령이 나타나 군부대를 몰살시켰다는 삼류영화에서도 나오지 않는 우스운 생각보다는 그쪽이 더 나았다. 테러리스트와 싸우는 군대 정도면 최소한 이류영화급 이상의 스토리와 화면은 나온다.
“그러니까...”
임유혁이 더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했을 때였다. 갑자기 머리 위에서 헬기가 굉장한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조금 전에 지나갈 때보다 훨씬 크고 날카로운 소리였다. 그리고 동시에 찢어지는 것 같은 개틀링 기관총 총성이 하늘에서 연거푸 울렸다
부르륵! 부르륵!
“뭐야!”
임유혁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시선 한가운데에 거무스름한 어떤 형체가 떠올라 있었다. 박쥐 날개처럼 가죽으로 된 날개가 달려있는 데다가 크기가 사람보다 더 큰데다 손과 발이 달려있는 인간 모양이었다. 인간의 일반적인 상식에, 저런 존재는 없다!
“... 아, 악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이윤수 이병이 장갑차 뒤에 머리를 가져다 댄 채 벌벌 떨기 시작했다. 임유혁 역시 마찬가지로 고개를 처박고 벌벌 떨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이윤수보다는 더 상황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야! 이 새끼야! 어서 총 겨누지 못해!”
날개달린 것의 추격을 발로 달려서 떨쳐낼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싸울 수밖에 없다. 임유혁은 알 수 없는 공포에 떨리는 몸을 억지로 다스리며 가지고 있는 K-2 소총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하지만 내심 그는 헬기가 저 괴물을 처리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상황은 다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날개가 달린 그 괴물은 헬기 로 상대하기에 너무 빨랐다. 헬기가 자기 주변을 맴돌던 괴물을 어떻게든 조준해서 공격하려고 했지만, 괴물 쪽이 훨씬 민첩하고 빨랐다. 돌려 달려드는 괴물에게 기관총을 조준하려고 했지만, 괴물은 삽시간에 헬기 측면 방향으로 달려들어 측면 도어를 뜯어내고 기내로 손인지 무엇인지를 밀어넣고 있었다. 그 손이 둥근 물체를 움켜쥐고 헬기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과 동시에 헬기가 맥없이 허공에서 빙빙 돌며 천천히 지면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임유혁은 입 속에서 치미는 구역질을 느끼며 소총을 들어 그 괴물을 조준했다.
“뒈져버려!”
사격명령도 없이 쏜 것이었지만 그의 총구에서 불을 뿜자마자 소대장의 사격명령도 떨어졌다. 부대 내에서 명사수로 소문났던 그의 총탄은 20미터 고도에서 당당하게 허공에 떠 있는 괴물을 향해 지체 없이 날아가 박혔다.
“저럴 수가!”
그렇지만 괴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탄환이 전부 날개를 뚫고 몸속을 헤집어 놓았음에도 피조차 흘리지 않았고 움직임이 둔해지지도 않았다. 임유혁이 당혹해하는 사이, 육중한 폭음이 일었다. 조종사를 잃은 헬기가 가까운 곳 지면에 격돌해서 폭발한 것이다.
“저 괴물, 대체 뭐야!”
열명 가량의 일제사격을 받고도 끄떡도 없는 괴물을 보고는 임유혁이 속한 소대원 전부가 입을 딱 벌렸다. 소총탄으로는 쏘고 또 쏘아도 소용없었다. 유탄발사기로 유탄까지 쏘았지만 느린 유탄은 간단히 빗나갈 뿐이었다.
위이이잉! 철컥!
그러자 이번에는 장갑차의 40밀리 주포가 괴물을 노렸다. K-30 비호 대공자주포의 것을 전용해서 대공사격에 우수한 대응능력을 보이는 한국형 보병전투장갑차의 화기관제장치는 마하 0.8 이하로 비행하는 목표에 대해서는 거의 백발백중이라 말해도 좋을 정도였다. ATS(Auto Tracking System, 자동추적/조준장치)가 조준을 끝내는 것과 동시에 목표에 대한 적절한 사격 기회를 잡은 주포가 자동으로 연거푸 십여 차례 불을 뿜었다. 한 발 한 발이 수류탄 이상으로 강력한 위력을 자랑하는 40밀리 고폭탄이 연거푸 명중하자 괴물의 몸이 삽시간에 산산조각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찢어진 가죽과 살점들이 우수수 날리는 모습이 어스름 속에서 화려하게 날렸다. 화려하다기보다는 끔찍한 광경에 임유혁이 구역질을 억지로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 임 병장님, 아까 그거... 뭐였는지 아십니까?”
이윤수 이병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임유혁의 지시를 듣고 정신을 차린 그는 방금전까지 열심히 쏘던 소총의 탄창을 갈고 있었다. 임유혁 병장은 역시 탄창을 갈며 대답했다.
“새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어쨌든 죽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해!”
“아, 알겠습니다!”
임유혁도 속으로는 떨고 있었다. 지금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다만 방금 장갑차가 괴물 하나를 해치웠으니, 제발 이거로 오늘 밤의 상황이 다 끝나기만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저, 저기!!!”
그 소리를 들은 임유혁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입을 딱 벌리고 그대로 굳어졌다. 해가 막 지고 있는 무너진 건물들 사이로 새까맣게 날아오는 것들이 보였다. 처음에는 까마귀떼나 철새무리 같았지만, 가까이까지 접근한 그것들은 까마귀도, 철새도 아니었다. 무전기로 상황을 보고하던 통신병과 소대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대, 대체...!”
임유혁 병장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사이, 그 물체들은 장갑차 위로 까맣게 몰려들어 단숨에 지면으로 강하하기 시작했다. 아까 헬기를 덮친 것들과 똑같은 괴물 수백 마리가 허공에서 그를 목표로 달려들고 있었었다.
“악, 악마다!”
누군가 이렇게 외쳤다. 그렇다. 이것들은 악마였다. 임유혁은 그가 쏘는 탄환을 다 맞고도 달려드는 괴물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검고 퀴퀴한 가죽 같은 것에 덮여있는, 입에서 녹색의 점액질을 침처럼 질질 흘리는 괴물. 파충류의 눈을 연상시키는 괴물의 녹색 눈동자와 그의 눈이 마주치는 것과 동시에 그는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와 동시에 탄창에 담긴 탄환이 다 떨어졌는지 장전손잡이가 후퇴 상태로 고정되었다. 그리고, 지금 그의 총에 탄환이 떨어졌다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괴물이 몸서리치도록 무서운 소리를 지르며 손을 뻗어 임유혁의 가슴을 노리고 덤벼들었다. 발톱에 묻은 시커먼 혈흔이 또렷하게 보였다.
“으아아아아아아!”
이윤수가 비명을 지르며 총을 내팽개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공포에 질려 미쳐버린 것 같은 얼굴이었다.
“너! 이 새끼! 이건... 우읍!”
이윤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소리치던 임유혁은 무언가가 가슴팍에 와닿는 것 같은 느낌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괴물의 날카로운 손이 자기 가슴을 뚫고 내장 안쪽을 헤집으며 뭔가를 움켜쥐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통증이 온몸을 휘감았다.
“으아아악!”
투투퉁! 투퉁!
달려드는 괴물들을 향해 쉬지 않고 40밀리 기관포를 쏘아대던 장갑차도 곧 최후를 맞았다. 장갑차 위에서 맴을 돌며 비행하던 괴물들이 일제히 입속에서 괴상한 용액을 토해내고, 그 용액을 뒤집어쓴 장갑차는 단숨에 얼어붙었다. 마치 액체질소 통에 빠진 금붕어처럼 장갑차는 그 자리에서 새하얀 서리에 뒤덮여 침묵했다. 그리고 그와 거의 때를 같이해서 난사하는 소총소리가 끊겼다. 이제 더 이상 저항하는 자는 남아있지 않았다.
“지원 바란다! 즉각 지원을... 아악!”
무전병마저 머리가 몸에서 뜯겨져 나가고 시체와 목이 따로따로 바닥에 뒹굴자, 그나마 살아남은 병사들마저 뿔뿔히 흩어져 도주하기 시작했다. 어쩔 수가 없었다. 싸우는 것도 싸울 수 있는 상대에게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미 그들에게서 이성적인 사고는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그저 달아나야 한다는 본능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살려줘! 살려줘!”
제일 먼저 달아난 이윤수 이병은 몇 번이고 넘어지면서도 기다시피 일어나 쉬지 않고 계속 달렸다. 그를 따르던 동료들이 하나씩 악마들에 죽임을 당하는 속에서도 그만은 아직 공격을 당하지 않았다. 그의 등뒤에는 아직 괴물들이 쫓아가 죽일 병사들이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탓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퍼억!
뒤쪽을 돌아보며 달리던 그는 정면에서 누군가와 부딪쳤다.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진 이윤수의 방탄모가 벗겨져 바닥에 부딪히며 탁한 소리를 냈다.
“우아아! 으아! 아아아!”
이윤수는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손발을 마구 허우적대며 비명을 질렀다. 이제 죽는가 싶었다. 그리고 그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괴물의 크르릉대는 소리가 아니라 진짜 사람 목소리였다.
“무슨 일입니까?”
“... 악마! 악마가...! 어서 도망쳐요, 어서...!”
이윤수 이병은 공포에 질려 굳어버린 성대에 최대한 힘을 넣어 고함치며 일어섰다. 하지만 방금 그가 부딪친 사람은 놀랍도록 침착했다.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어디 있습니까.”
“저기! 저기요! 어서 도망치지 않으면 죽어요, 죽는다고!”
이윤수 이병은 그렇게 소리치면서 앞에 있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긴 회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가느다란 무테안경을 쓴 다소 어리게 보이는 청년이었다. 어둠 속이라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아무런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크아악!”
그리고 머뭇거리는 사이에 악마 하나가 날아들어 이윤수 이병을 덮쳤다. 방탄모가 벗겨져 드러난 맨머리를 향해 손을 뻗는 악마의 손길을 느낀 이윤수 이병은 순간 눈을 감았다. 피할 수도 없었다. 잠시 후 다른 동료들처럼 저 손에 목을 비틀려 머리를 뽑힐 걸 생각하면 끔찍했다. 저 빌어먹을 민간인 때문에 죽는구나 싶었다.
퍼억!
피와 살점이 튀었다. 산산히 부서진 살과 뼈가 흩어지는 가운데 이윤수 이병은 눈을 떴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친 데도 없었다. 그는 깜짝 놀랐다. 방금 자기를 향해 날아든 그 악마. 소총탄을 맞아도 끄떡없었고 장갑차 주포를 맞고서야 쓰러졌던 그 악마가 바로 앞에 있던 이 청년의 일격에 잘 익은 홍시처럼 터져나간 것이다.
“다, 당신은...?”
이윤수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이제는 괴물보다 이 청년 쪽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청년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짧게 대답했다.
“이치우라고 합니다.”
이치우라는 이 청년은 왼손에 작은 PDA 하나를 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른손 하나만으로 단숨에 악마를 없애버린 것 같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저 괴물도, 이 청년도 도저히 그의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모든 걸 끝내기 위해 왔습니다.”
청년이 그렇게 말하고는 방금 전 헬기가 추락하고 장갑차를 포함한 소대원 전부가 몰살당한, 악마들이 날아오는 K구역 중심부 쪽으로 느긋하게, 그러나 당당하게 걷기 시작했다. 이윤수 이병은 경악한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모든 걸 끝내기 위해 왔다고?”
다가가는 그의 정면으로 피맛을 본 악마들이 새까맣게 달려들었다.


삐익. 뚜두둑! 뚜둑!
이치우는 가지고 있는 PDA 화면을 보았다. 그곳에는 방금 전 전멸당한 군인들이 그저 괴물이나 악마라고만 생각했던 것들의 정체가 분석되어 나타났다.

분석결과
추정 영체명: 안드라스(Andras)
동반 영파치: 15
행동패턴: 보통, 통제되지 않음.
영체코어: 작은편(small)
의사소통: 대화가능
실시간 영체 캡처: 가능
영체입자량: 33PG
설명: 성서에서 솔로몬왕에 의해 봉인당한 72명 악마 가운데 하나. 지옥의 후작으로 불리며 불화의 씨앗을 품고 있는 검은 까마귀 형상이다. 불꽃의 검을 가지고 논쟁을 일으킬 행동을 일삼는다.

그 데이터는 지금 치우에게 새까맣게 달려드는 괴물들의 모습과 일치했다. 거대한 몸에 날개와 팔과 다리가 달려있었지만 머리는 갈가마귀를 닮았고 피부는 미끌미끌한 기묘한 형체였다.
“그럼...”
치우는 정보 확인을 끝낸 PDA를 몸 뒤로 감추며 오른손을 쭉 뻗어 앞을 향했다. 동시에 몸을 옆으로 돌리며 오른쪽 발을 앞으로 놓았다.
“시작해볼까.”
그는 왼손에 움켜쥔 PDA의 스위치 하나를 켰다. 그러자 PDA 안에서 복잡한 프로그램이 가동되며 대량의 데이터가 처리되었고 그 프로그램 코드들이 다시 연기같은 기운이 되어 치우의 몸을 덮었다.
“타앗!”
치우는 즉각 앞으로 돌진했다. 그의 트렌치코트가 펄럭이며 등에 메고 있는 작은 배낭 하나를 비쳤다. 'Ghostron Bomb 5.45Millon PG' 라고 적힌 문자가 선명했다. 하지만 코트는 다시 등을 덮었으며 그의 손은 달려드는 악마 안드라스를 향했다.
퍼억!
정면에서 날개를 벌리고 피 묻은 발톱을 내밀던 안드라스 한 마리가 바로 뻗은 치우의 주먹에 맞아 피떡이 되어 바닥에 처박혔다. 이어서 오른쪽 옆에 있던 안드라스가 팔꿈치에 머리를 맞아 머리가 돌아가며 공중에서 팽이돌듯 빠르게 회전했다.
끄아악!
괴성을 지르며 왼쪽에서 안드라스의 일격이 들어왔다. 공격헬기의 두터운 방어유리까지 부순 날카로운 부리공격이었다. 치우는 오른손바닥으로 그 부리를 막아 돌렸다. 힘의 중심을 잃은 안드라스의 몸을 향해 치우의 왼쪽 무릎이 강렬한 타격을 가했다. 가죽조각이 우수수 떨어지며 날개가 꺾이고 머리가 부서진 안드라스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쏴아아!
치우의 머리 위쪽에 있던 안드라스들이 입에서 점액을 뿜었다. 내리고 있는 눈발을 뚫고 극도로 차가운 액체가 치우의 몸을 덮쳐왔다. 장갑차를 얼렸던 엄청난 냉기였다.
치우는 왼손을 앞으로 뻗으며 손가락으로 PDA의 스위치 하나를 눌렀다. 치우의 의식 속에서 만들어진 명령이 연기의 형태로 PDA로 흡수되며 컴퓨터 회로를 타고 처리되었다. 처리된 명령이 다시 PDA 앞쪽에 있는 작은 단자를 통해 놀라운 마법이 되어 나타났다.
“리플렉션(반사)!”
치우의 코앞까지 이르렀던 액체가 거울에 반사된 빛처럼 역류하여 그것을 쏜 안드라스를 덮쳤다. 안드라스들은 삽시간에 그 액체를 맞고는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얼어붙어 바닥에 떨어졌다. 워낙 강하게 얼어붙은 그 덩어리들은 유리조각처럼 부서져 흩어졌다.
끼익! 끼끼끼!
알 수 없는 소리를 주고받으며 안드라스들이 다시 덮쳐왔다. 하지만 치우는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닥치는 대고 치고 때리며 용감하게 싸웠다. 날렵하고 부드러운 몸놀림으로 몸 가까이 접근한 모든 안드라스들을 단번에 쳐서 제압하는 그의 주먹은 가공할 위력을 보여주었다. 안드라스를 헛친 그의 주먹이 명중한 콘트리트 기둥 하나가 썩은 수숫단처럼 부러지며 무너졌다.
“너희들은 내 상대가 안돼.”
치우가 발을 한번 구르자 그의 몸이 10미터 위로 솟았다. 양쪽으로 뻗은 그의 발이 회오리를 일으키며 안드라스 두 마리를 해치웠다. 구름처럼 날아오는 안드라스들은 치우의 몸에 손도 대지 못하고 차례로 튀어나왔다.
“이걸로 끝내자!”
치우의 몸 주위에 있는 연기가 갑자기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기포가 일어나는 그 연기의 흐름이 점차 치우의 몸을 감싸는 작은 태풍처럼 눈을 형성하며 돌기 시작하자 달려든 안드라스들이 그 흐름에 휩쓸려 몸에서 떨어졌다. 그들이 지르는 비명이 요란하게 울리는 가운데 치우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며 외쳤다.
“익스플로전(폭발)!”
펑! 펑! 퍼펑!
안드라스들이 연기와 함께 위로 치솟으며 그들의 몸이 폭죽처럼 터져나갔다. 조금 전 소대 하나를 몰살시킨 그들이 거꾸로 몰살당하는 순간이었다.
“후우...”
숨을 고르며 눈을 뜬 치우의 주위에 더 이상 살아있는 안드라스는 없었다.
그러나 잠시 숨을 고르던 치우의 앞에 있는 대형 광고용 스크린이 켜졌다. 그 안에서 기묘한 얼굴과 모습을 한 남자가 나타나 치우를 향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슈나이더 백작...”
치우의 입에서 저주와 분노와 공포와 온갖 감정이 섞인 어조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반갑군. 다시 돌아온 걸 환영한다!”
화면 속의 남자가 말했다. 스크린의 음성과 함께 어딘가에 있는 대형스피커가 남자의 말을 증폭해 허공에 토해냈다.
“이치우. 네가 설마 최후의 도전자가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거대한 그 힘을 손에 넣은 것이 이제 나 혼자만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허전하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하는군.”
“난 내가 원해서 얻은 게 아니야! 탐욕으로 가득 찬 당신과는 달라!”
치우가 대답했다.
“당신은 너무도 엄청난 짓을 하고 있어. 인간이 만든 과학의 힘을 이용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벌인 거야. 심지어 그 힘은 주인인 당신까지 파괴하고 말 거야. 난 그것을 막기 위해 왔어. 그리고 당신이 벌인 이 저주스러운 모든 것을 끝내고 말 거야!”
“후후후!”
백작은 그의 말을 어디선가 듣고 있는 듯 곧바로 대답했다.
“원해서 얻지 않았다고? 그렇다면 강제로 누군가 너에게 주입이라도 했단 건가? 상황이 어쩌니 해도 너 역시 이 힘을 원한 거야. 영혼의 힘, 그리고 인류가 여태까지 모르고 있었던 그 힘을 말이야. 난 네가 진정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지. 너는 인류의 구원이나 재난의 종식 따위에는 관심이 없어. 지금 네가 원하는 건 겨우 단 한 명의 여자 때문이야. 그녀를 구하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넌 벌벌 떨며 도망쳤을 거야. 내 말이 틀리나? 틀리다면 반박해봐!”
화면이 바뀌었다. 백작의 모습이 사라진 스크린에는 하얀 옷을 입고 고풍스러운 침대에 누워있는 한 여자의 모습이 비쳤다. 눈부신 금발과 하얀 피부를 가진 그녀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 곤히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흰 목에는 뚜렷한 이빨자국 두개가 나 있었다.“
치우는 이를 악물었다.
“백작!”
“그래. 공주님에겐 왕자님의 키스가 필요하겠지.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왕자님이 과연 성을 지키는 무서운 드래곤의 화염을 피할 수 있을까? 너는 오로지 그것을 위해 힘을 얻었지만 곧 무력함을 실감하고 말 거다. 그리고 분노와 고통을 안고 죽어갈 거야. 벌레처럼 말이다. 하하하!”
백작의 큰 웃음소리를 마지막으로 스크린이 꺼졌다. 치우는 잠시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었다. 천천히 지평선에 깔리는 어둠과 하얗게 내리는 눈발이 그의 코트를 덮었다.
“죽는 게 과연 누구일지는 해봐야 아는 거다.”
침묵을 깬 치우는 고개를 들고는 한발을 앞으로 내밀며 힘차게 굴렀다.
“흐아압!”
우렁찬 기합이 나오며 그의 코트에 있던 눈이 사방으로 쫘악 퍼지며 뒤쪽으로 흘렀다. 치우의 몸에서 나오는 기(氣)가 눈과 어둠을 가르며 퍼져나가는 모습이었다.
“지금 간다! 기다려라, 백작!”
치우의 몸이 화살처럼 폐허속을 뚫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제부터 벌어질 장엄하고 처절한 싸움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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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병도 -


* 안병도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4-07-17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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