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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전쟁소설  // 남해 //  1권

copyright (C) 2001 김경진 안병도
(전쟁소설 데프콘 1, 2, 3부, 동해, 남북, 판타지 하늘길잡이 공동저자)


1. 새벽

= 탐망선, 탐망군관 임중형

작은 배가 검은 물결을 따라 천천히 흘러갔다. 돛을 접은 이 작은 탐망선에는 조선수군 여섯 명이 몸을 바짝 낮추고 있었다. 왜선 수백 척이 정박중인 어란포 앞바다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 수군들은 몸이 뻣뻣이 굳었다.
“버글버글하요. 근디 게우 이백 척이라고라? 그 놈들 눈깔이 삐었는 갑다.”
숨막히는 침묵을 깨고 고물에서 기가 차지도 않는다는 듯이 누군가 내뱉었다. 탐망군관 임중형이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늙은 키잡이 넘어, 그리고 거세게 흐르는 검은 바다 건너, 희끄므레한 진도 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덕신산에 대부분 가린 첨찰산과 죽제산 봉우리가 서해 바다로 지고 있을 보름달빛을 배경으로 검게 우뚝 서 있었다. 일본 척후선들을 피해 빙빙 돌아오느라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멀리 동쪽 바다 수평선에 걸친 먹구름이 조금씩 불그스름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어.”
임중형은 다시 초조한 눈길을 어란포로 돌렸다. 어둠 속에 잠긴 어란포 앞바다에는 일본수군의 척후선들인지 갑판에 횃불을 밝힌 작은 배들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다른 왜선에 비해 작다고는 해도 노가 한쪽에만 열 개나 달리고 갑판에는 창칼을 든 왜병들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는 전투선이었다. 전투능력이 거의 없는 조선수군의 사후선, 탐망선과는 근본이 전혀 달랐다.
“야습을 경계하는 건가? 알 수 없군. 낮도깨비 같은 무식한 왜 수군 놈들이 저렇게 절도 있게 행동하다니. 이전하곤 영판 다른데, 도대체 어떤 놈들인가?”
임중형이 갸웃거리자 격군들과 함께 엎드려 있던 준사가 딱딱 끊어서 대답했다.
“배 크기가 작고 모양으로 볼 때, 포구 바로 앞에 있는 것들은, 무라카미村上 해적의 고바야입니다. 아! 역시 구루지마 해적입니다. 붉은 깃발 아래에 카미라는 글자가 있지요?”
“어디? 그, 그래. 상上 자 말인가?.”
#“맞습니다. 산쥬, 산쥬이찌, 산쥬니. 예! 구루지마 해적은 다 합해서 32척입니다. 저놈들은 대개 여덟 척씩 움직입니다.”(임중형이 32척인지는 보면 알텐데, 굳이 산쥬 산쥬이찌 라고 세면서 따로 보고할 필요가 있을까?)
“해적이라니. 그럼 저놈들은 왜 땅에서도 원래부터 수군이었단 말이지? 그래. 그럼 대장은 누군가?”
항복해온 왜병 준사가 조선말을 배우려는 노력 이상으로 임중형은 준사를 통해 일본수군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일본에서는 해적과 수군이 거의 같은 뜻이라는 것도 준사에게 들었다.(윗 대사와 조금 어긋나는 듯 하다; 원래부터 수군이라는 것을 들었는데, 다시 확인하는 것은 조금 어색. 차라리 임중형의 말 뒤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왜에서는 해적을 수군이라 합니다.(?)”등으로 풀어쓰는 것이 좋을 듯. 아울러, 해적과 수군이 ‘거의 같은 뜻’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 같은 단어로 쓰고 있다면, 그렇다고 명확하게 이야기해주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러나 이번에 준사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말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였다.
“구루지마 노가미 이름은 그 고장 이름과 같은 구루지마 도노입니다. 분로쿠 1년에 미치유키가 조선수군에 패해 죽었으니 동생 미치후사가 성주이며 대장이 됐을 겁니다.”
임중형은 뭐가 성이고 이름이고 뭐가 관직이며 지방 이름인지 마구 헷갈리기 시작했다. 세필과 종이를 꺼낸 임중형은 준사에게 다시 물어보기 뭣해 구루지마 도노라고 들은 왜 수군장 이름을 간단히 마돈오馬頓吾로 적었다.
그리고 임중형은 구루지마 수군의 포진과 배 숫자를 크기별로 나눠 적었다. #그러나 임중형은 어떤 배가 대장선인지 쉽게 파악할 수 없었다. 왜 수군함대를 지휘하는 대장선을 파악하는 것은 별망군의 중요한 임무였다.(이상 두 문장의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다.) 그것은 초전에 대장선을 집중 공략하는 조선수군의 전술과도 깊은 연관이 있었다.
일전에 준사는 작대기에 둥근 공이나 우산이 매달려 있거나 술이 많이 달린 천으로 만든 특이한 깃발, 즉 마인馬印이라는 것이 있는 배가 대장선인 어립선御立船이라 했다. 그런데 왜 수군함대에는 깃발이 종류별로 하도 많아 희미한 달빛과 횃불 빛만으로는 대장선을 찾기가 난감했다. 밤눈이 밝은 준사도 못 찾은 모양이었다. 임중형이 갑자기 생각난다는 듯이 물었다.
“마다시라는 자가 왜놈 수군장 가운데서 가장 용감하다고 소문이 났던데. 혹시 저기 있으면 어디 있는지 찾아주게.”
“아! 구루지마 도노가 바로 그 마다시입니다. 그렇습니다!”
준사가 고개를 연신 끄덕거리자 임중형은 더더욱 곤혹스러웠다. 마돈오 옆에 마다시馬多時라고 작은 글씨를 덧붙였다.
임중형이 다시 고개를 들어 왜선들의 동태를 살폈다. 왜 척후선들 뒤에는 수많은 배들이 있었지만 어란포 앞의 작은 섬인 어불도에 가려 다 보이지 않았다. 어느덧 배는 남동쪽으로 계속 흘러 어란포에 상당히 가깝게 다가가고 있었다. 고개를 내밀어 살피는 임중형의 소매 깃을 잡고 키잡이가 조바심을 냈다.
“군관 나으리! 돌아갑시다. 인자 우수영으로 돌아가도 안 되겄소!”
“조금만 더 들어가세.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어란포가 다 보이겠네.”
임중형이 낮게, 그러나 강하게 명령했다. 어란포까지는 바닷길로 사오리 정도 거리였지만 워낙 고요한 새벽녘이라 말소리가 왜군에게 들릴까 겁이 날 정도였다.
“뭐라고라? 더 들어가라고라?”
느닷없는 큰 소리에 격군들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발끈한 늙은 키잡이는 목소리를 낮추라는 임중형의 손짓에도 아랑곳 않고 떠들어댔다.
“그러다가 왜놈들한테 잡히서 디진 놈들이 요 며칠 새 을마나 되는 줄  아요? 싸움도 하기 전에 엄한 탐망꾼만 다 직이뿔겄소! 글고, 아무리 이 통제사 어른이래도 저놈들 상대로 싸움이나 되겄소? 쩌거 쫌 보씨요, 잉!”
키잡이가 가리킨 곳으로 임중형이 고개를 돌렸다. 그 사이에 날이 더 밝아져 있었다. 남서쪽으로 트인 어란포 앞바다 전체가 희끗희끗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눈앞에 펼쳐진 놀라운 광경에 격군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아까는 어란포와 어불도 사이로만 왜선들이 보이더니, 이제는 어불도 오른쪽 바다에도 왜선들이 정박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란포 앞바다는 서쪽 끝의 어란포에서 시작해 남쪽 끝인 갈두까지 바다를 빙 둘러싸고 기다란 해안선이 이어졌다. 그리고 파도가 잔잔한 그 안쪽 바다에 왜선이 해안을 따라 빼곡이 늘어서 있었다. 저 멀리 양도 근처에도 불빛이 어른거리는 걸로 봐서 갈두까지 왜선들이 정박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곳 해안선 길이가 거의 30리니 왜군의 배는 얼추 잡아도 500척은 넘었다.
“저 넓은 바다하고 갯벌이 왜선으로 다 채워졌어. 음!”
#임중형은 8월말에 땅끝마을이라고도 불리는 갈두에서 조선 수군함대가 잠시 머물러 아침을 지어먹은 기억을 떠올렸다. 갈두는 남쪽으로 보길도와 추자도, 동쪽에는 완도, 서쪽으로는 진도가 보이는 해남현의 남쪽 끝이었다. 다도해라지만 이곳에서는 남서쪽으로 펼쳐진 널따란 수평선을 볼 수 있다. 그래서 파도도 센 편이었다.
갈두가 괘도포 또는 도괘포刀掛浦라는 한자로 달리 기록된 것은 갈이 칼의 옛말이고 괘는 걸 괘掛 자로 갈과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현대 우리말로 하면 갈두 또는 도괘포는 칼머리, 즉 뾰족한 해안이나 포구 정도이다. 그러나 사실은 바로 뒤에 낮지만 경사가 급한 갈산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이상 두 문단은 갈두에 대한 설명이기는 하지만, 굳이 넣을 필요는 없는 듯 하다. 초반부이기에 삭제 내지는 줄여도 될 듯. 집중력이 순간적으로 떨어지는 부분이다.)
“저쪽 배들은 깃발이 다른데, 장수는 누군가?”
임중형이 준사의 어깨를 치며 가리킨 곳에는 구루지마 수군의 것보다 훨씬 큰배들이 정박하고 있었다. 그 배들에 걸린 무수한 깃발 가운데 공통된 것, 즉 그 함대의 군기는 흰 바탕에 동그란 원이 다섯 개씩이었다.
“음. 동그라미가 셋이 아닌 다섯이라니. 어쨌든 도도 다카도라가 틀림없습니다. 등당좌도수라면 아시겠군요.”
“좌도수? 잘 알지. 옥포에서 패한 놈이야. 그런데 구귀라는 수로대장이 여기에도 왔나?”
임중형은 #잠시 뿌듯했다.(매끄럽지 않은 문장인 듯.) 임진년에 조선수군이 연달아 대승을 올린 상대는 #저런 왜 수군함대였다.(저런 왜 수군함대라는 것이 명확하지 않다. 규모가 큰 수군함대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확실하게 크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어떨지.) 일본수군은 조선수군의 존재를 무시한 채 배를 대놓고 포구마을을 노략질하느라 경황이 없다가 바다에서 들이치는 조선수군을 맞아 제대로 된 싸움도 해보지 못하고 거의 전멸 당했다.
바람처럼 느닷없이 나타나 불처럼 공격하며 총통과 화살을 우레처럼 쏟아 부어 적 함대를 전멸시키던 그 때가 가장 신이 났었다. 임중형은 조선수군이 패배시킨 일본 무장들 이름을 한참 지난 뒤에 알았고, 나중에도 그들을 우습게 여겼다. 하지만 그들은 일본에서는 알아주는 용맹한 무장들이었고, 칠천량에서 간신히 도망칠 때는 그 왜군들이 마치 귀신처럼 무서웠다.
“동그라미 일곱 개를 그린 군기는 없습니다. 아마 구키 수군은 부산포를 지키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일본수군 대장은 바로 좌도수 저 자일 겁니다.”
어란포를 가득 메운 왜선들을 한참 살피던 준사가 도도 다카도라 함대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당시 일본수군의 선임 무장이라 할 수 있는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는 대마도와 부산포간 항로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었으니 준사의 판단은 옳았다.(바로 위에 준사가 구키 수군이..모양이라고 추측했음에도, 뒤이어 옳았다..는 등의 확실한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색하다. 해설처럼 덧붙이며 하고 싶다면, 한 문단을 독립시키고 ‘실제로 당시 일본수군의...’ 등처럼 보다 확실하게 이야기해줄 것.)
“왜적이라고 하게!”
“예, 예. 왜적 두목은 좌도수입니다.”
준사가 임중형의 싸늘한 눈길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임중형이 다시 슬쩍 어란포 방향을 살피더니 키잡이를 불렀다.
“자, 타공! 더 가까이 가 보세. 저기서는 여기가 안 보일 테니 걱정말고.”
“아따! 안 댄당께요. 저그 왜놈 배들이 왔다리 갔다리 항 거 안 보이요? 인자 날도 새부렀소. 지발 살리주씨요, 잉?”
키잡이 말처럼 도도 다카도라의 본진에서도 작은 배들이 나와 주변을 경비하고 있었다. 요 며칠간 계속 조선수군이 야습을 극도로 경계한 것처럼 일본수군도 야습을 겁내는지 경비는 철저한 편이었다. 엄중히 경계하는 모습을 본 임중형은 오히려 용기가 생겼다.
“우린 수군이야! #특히 우리는(우리를 연달아 쓰는 것보다 ‘그 중에서도’(or 그것도)로 바꾸는 것이?) 적세를 탐지해야 할 탐망군이고. 왜놈들은 아무리 수가 많아도 우리 조선수군을 상대할 수 없음을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그건 옛날 이야기지요. 칠천량에서 버얼써 벌써 끝장나부른 이야그 아니요?”
“어허! 타공, 이노오옴!”
임중형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칠천량 해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지난 두 달 간 조선수군에게는 절대 금기였다. 싸움 결과도 창피했지만 그 싸움 과정은 조선수군에 적을 둔 사람이라면 남들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겪은 공포가 그대로 남아있는 데다가 지금은 훨씬 적은 수로 바로 그 적과 맞서야 한다는 현실 때문에 두려움을 감출 수 없었다.(누가? 그리고 바로 윗문장은 해설인데, 다음문장은 누군가의 마음? 매끄럽지 않다.)
늙은 타공舵工은 키를 움켜잡은 손을 심하게 떨었다. 지금도 키를 조금씩 오른쪽으로 돌려서 배는 천천히 어란포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돌아가자는 말만 떨어지면 잽싸게 키를 돌려 진도 쪽으로 달아날 태세였다. 그러나 탐망선을 지휘하는 군관 임중형은 도대체 겁이 없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키잡이가 다시 한번 대들었다.
“우리 다 디저불믄 군관 나으리 혼자 노 저 갖고 갈라요? 살아서 통제사 어른께 보고해야 되꺼 아니요. 육지에도 탐후꾼들이 있응께 너무 무리하지 말더라고요. 잉?”
“그놈들이 제대로 일을 못하니까 우리가 나선 게 아닌가?”
참지 못한 임중형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키잡이가 움츠러들었다.
지상에서 활동하는 자는 척후군관 임준영 말고도 많았다. 이순, 박담동 같은 정탐인들은 물론 전라좌수영 소속 관노비 태귀생, 박수환 같은 날랜 자들도 있었다. 다들 임진년부터 이순신이 적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적지로 내보내거나 개인적 심부름을 맡긴 심복들이었다.
그러나 왜군들이 어란포에 집결한 다음부터 지상에서 정찰하기는 쉽지 않았다. 열을 내보내면 서넛은 돌아오지 못했고, 나머지도 제대로 된 정보를 갖고 온 적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척후장을 맡은 영등포만호 조계종의 판옥선은 바다에서 적을 찾는 척후 임무에 투입되지 못하고 사실상 조선수군 정박지의 외곽 경비선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계속되는 일본수군의 야습을 막는데 판옥선 한 척으로도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최근 한 달 사이에 소규모 수전이 서너 번 있었고, 그때마다 통제사의 진두 지휘로 간신히 왜선들을 몰아낼 수 있었다. 소규모라고는 하지만 통제사가 지휘하는 조선수군 전선 전체가 동원된 총력전이었고, 겁에 질린 수군들은 싸우려는 의지가 아예 없었다. #경상우수사 배설은 보름 전에 이미 도망갔다.(->도망간 터였다.)
회령포부터 어란포까지 전라도 서부 남해안 일대에서는 매일 같이 조총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것들이 다 본격적인 전투 직전의 전초전이라는 사실은 조선수군이나 일본수군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타공! 너무 걱정 말게. 나한테 활이 있잖은가? 저놈들 조총이 닿지도 않는 거리에서 쏠 수 있어.”
임중형이 가죽활집에서 작은 활을 꺼내 보였다. 쇠뿔을 이어 붙인 싸구려 향각궁이 아니라 물소뿔로 만든 정통 각궁이었다. 그러나 키잡이는 통제사가 직접 임중형에게 하사했다는 검은색 활을 싸늘하게 내려보며 코방귀를 뀌었다.
“새벽이슬 머금은 활이 무슨 소용이 있다요? 짠바람 묵고 풀어진 활줄 백날 땡겨 보씨요. 화살이 제대로 나가나.”
“어허! 이 사람이, 통상 대감을 우습게 보나?”
임중형이 노인을 쏘아보았다. 활을 우습게 본다는 것은 그 활을 준 통제사를 우습게 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논리였다. 그러자 기가 질린 늙은 키잡이는 당장 꼬리를 말았다. 더 이상 버텼다간 치도곤을 칠 것이다. 군관 임중형에게서 받는 처벌은 별로 두렵지 않았으나 만약 임중형이 통제사에게 일러바치기라도 하는 날이면 키잡이는 그 날로 죽은목숨이었다. 겁도 없이 첨사, 부사에게 곤장을 치는 수사가 이 통제사 말고 조선 땅 어디에 있단 말인가?
조선수군들은 잔인한 왜군보다 통제사를 훨씬 더 무서워했다. 평소에는 부하 수졸들을 자상하게 살피지만 전쟁과 관련된 일에서는 추호도 용서함이 없었다. 조선수군의 본영인 통제영이 한산도에 있을 때도 효수 당한 머리가 이곳 저곳에 걸려 있고 동헌에서는 곤장 치는 소리와 비명이 끊일 날이 없었다. 이 통제사의 명에 의해 참수 당한 조선수군이 왜군과 싸우다 죽은 숫자보다 더 많을 거라는 소문도 돌았다. 사실 전투에서 죽은 조선수군은 몇 안되니 그 말은 맞을지도 몰랐다.
하긴 그랬으니 조선수군이 왜군을 상대로 제대로 싸울 수 있었을 것이다. 짧은 사이에 그런 생각을 한 키잡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알겄소, 알겄어. 가믄 되꺼 아니요.”
키잡이가 나무로 만든 커다란 키를 중간에 놓고 고정막대를 걸었다. 그리고는 아예 뱃전에 드러누워 버렸다. 차가운 바람을 덜 맞게 되니 조금이라도 훈훈해진 것 같았다.
“씨불! 이 통제사 밑에 군관 아니랄까봐 더럽게 고지식하네. 인자 나는 모르겄다!”
“뭐라고?”
임중형이 쏘아보자 키잡이는 잠시 일어났다가 다시 드러누웠다.
“아따~ 나가 뭐라 그랬소? 조용히 있는 사람 괜히 윽박질르고 그랬쌌소.”
- 파앙! 파팡!
“뭐, 뭐야?”
엄청난 소리에 놀라 격군들이 급히 엎드렸다. 그러나 탐망선이 왜선에게 들킨 건 아니고, 육지에서 울린 총소리였다. 고요한 새벽하늘에 울린 총성은 바다를 넘어 여기까지 메아리쳤다. 어느 조선수군 탐후인이 복병한 왜병에게 걸린 것이 틀림없었다.
“쳇! 어느 놈이 또 경쳐부렀구만!”
격군 하나가 씁쓸히 내뱉었다. 몇 년 동안 왜 수군을 상대로 함께 싸운 거의 1만에 달하던 많은 동료들, 그러나 이제는 얼마 남지도 않았다. 한산도에서 돌림병에 걸려 허망하게 죽어갔고, 칠천량 해전에서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흩어져 어느 땅 어느 구석에서 죽었는지 알 수 없었다. 격군들은 수군 동료에 대한 안타까움보다는 적이 아직 이쪽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안도감에 한숨 지었다.
“동그라미 두 개가 연결된 게 아래위에 각기 한 개씩 그려진 군기라. 응? 저건 한산도에서 패전한 놈들 아닌가?”
“맞습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 스모토 성 성주를 하는 유명한 무장입니다. 아! 조선말로 협판중무, 또는 협판안치라고 합니다. 중무는 중무소보라는 벼슬 이름이라고 저번에 말씀드렸죠?”
작은 세필로 적어나가는 임중형 옆에서 준사가 거들었다. 손을 호호 부는 준사 입에서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벌써 겨울이 다가오는지 9월 중순인데도 무지막지하게 추웠다.
“다들 우리한테 한번씩 깨진 놈들이군. 몇 년 사이에 저렇게 많은 배를 갖추다니. 대단한 놈들이야.”
임중형은 괜히 큰소리를 하고 연달아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뱃전에서 꾸벅꾸벅 조는 격군들은 깨어날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준사는 어느새 코를 골며 세상 모르고 자는 격군들을 보며 씩 웃었다.
날은 점점 밝아오고 있었다. 이제 어란포 앞바다에 가득한 왜선들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임중형이 작은 붓으로 쓰는 글씨를 준사가 알아볼 정도였다.
“다스린다는 치입니다.”
준사가 종이를 힐끗 보더니 고쳐주었다. 잠시 준사를 물끄러미 쳐다본 임중형이 둘 치置 자를 지우고 다스릴 치治 자를 써넣었다.
“그래. 자넨 왜놈치고는 한자를 많이 알고 있군.”
준사는 임중형이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에는 전혀 해당되지 않았다. 왜놈 추장 평수길 뿐만 아니라 여느 벼슬아치나 영주, 중들도 한자를 제대로 아는 놈이 드물다고 들었다. 장수들은 더 심했다. 그런데 왜놈 졸개에 불과한 준사는 뜻밖에 한자를 많이 알았다. 조총을 쏠 줄 아는 왜놈은 한자를 좀 안다고는 하지만, 여느 항왜들과 달리 준사는 조선말 발음도 비교적 정확했다.
“저쪽은 가토 요시아키 수군이고. 아? 저기는 하치스카 이에마사 군입니다!”
준사가 놀라자 임중형이 왜선으로 가득 찬 바다 남쪽, 갈두 쪽을 살폈다. 그곳에는 다른 함대보다 작은 배들이 몰려 있는데, 무수한 전투를 치른 임중형이 얼핏 판단하기에 그 함대는 숫자만 많지 전혀 위협적인 세력으로 보이지 않았다. 작은 왜선으로 크고 높은 판옥선을 공격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배들보다 압도적으로 큰 층루선 세 척이 있을 뿐이고, 만卍 자를 단 커다란 깃발이 갑판에 휘날리고 있었다.
“자네, 왜 그러나?”
“하치스카 군은 수군이 아니라 육군입니다! 배도 대부분 고깃배나 니부네荷船, 그러니까 짐배나 다름없습니다.”
“사국 지방의 큰 영주라는 아파수가정 말인가? 그럼...”
준사의 말을 증명하듯 갈두 쪽에서 높은 말울음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임중형이 서둘러 일본군 장수 명단을 품에서 꺼냈다. 항왜들로부터 수집한 자료를 기록한 종이인데 신분이 낮은 졸병들 말을 종합해 만들어 틀린 부분이 많지만 그런대로 요긴하게 쓰이고 있었다. 임중형은 종이를 펼쳐 한자와 한글로 간단히 기록된 글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阿波守家政 姓名 蜂須嘉家政 或 하치스카 이에마사 官職 阿波守 兼 四國 大名 或 다이묘 則 大領主云 壬辰年 兵勢 七千二百也

옆에서 실눈을 뜨고 종이를 본 준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본 놈들 육군이 뱃길을 통해 북상하겠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전투 중에도 언제든 배에서 내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음! 우린 안중에도 없다는 소린가?”
임중형은 그저께 척후군관 임준영을 통해 전달된 김중걸이라는 자의 말을 떠올렸다. 왜군에게 사로잡혔다가 도망쳐 온 김중걸은 왜 수군들이 조선수군을 전멸시킨 후 한강으로 직접 올라가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통제사는 피난민들을 북쪽으로 올려보냈다. 그러나 왜 육군이 수전에 어떻게든 참전한다면 조선수군으로서는 골치 아픈 일이 많았다.
오랜 전란 기간 중 조선수군은 일본수군보다는 육군에게 입은 피해가 더 컸다. 작은 배를 타고 조총을 쏘며 달려드는 수군함대라면 그 수가 아무리 많아도 총통을 쏘고 불화살을 쏘아 모조리 불태워버리면 끝이었다.
그러나 육군 수송함대라면 골치 아파진다. 해안에 배를 대놓고 산에서 조선수군을 향해 대포를 쏘아댈 것이다. 조선수군 입장에서는 겨우 배 몇 척만 불태울 수 있을 뿐이고, 그것도 산에서 쏟아지는 총탄을 무릅써야 했다. 그리고 칠천량해전에서 조선수군이 큰 피해를 입은 것도 춘원포에 상륙한 다음이었다. 조선수군은 땅에서는 도저히 일본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군관 나으리! 들켰습니다. 저놈들이 이쪽을 봤어요!”
키잡이가 벌떡 일어나 키를 돌리며 외쳤다. 임중형이 왜선들을 보니 왜선에 일제히 횃불이 켜지고 뱃전에는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뭐라 외치는 소리도 들렸다. 임중형은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놀랐지만 왜군들 움직임이 좀 이상하다고 느꼈다.
“아냐! 이봐, 타공! 들킨 게 아니야. 왜놈들이 잠에서 깬 것 뿐이야!”
임중형이 타공을 말렸다. 그러나 그때는 새벽 추위를 버티며 꾸벅꾸벅 졸던 격군들이 퉁기듯 일어나 급히 노를 젓기 시작한 다음이었다. 임중형이 다시 뭐라 하기도 전에 공포에 눈이 뒤집힌 키잡이가 돛을 올렸다. 반으로 쪼갠 대나무를 이어 붙인 돛이 바람을 받아 부풀어오르면서 조용히 남동쪽으로 흐르던 배가 반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바보들! 그만 둬!”
임중형이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날이 조금 밝아졌더라도 10리 밖에서 조용히 흘러가는 작은 탐망선을 발견하기란 어려웠다. 그런데 왜선에 횃불이 켜진 것만으로도 깜짝 놀란 격군들이 황망히 돛을 올리는 바람에 왜군들에게 진짜로 들키고 말았다. 왜선 갑판 위에서 사람들이 이쪽을 향해 뭐라 외치는 소리가 까마득히 작게 들려왔다. 어느새 함대 외곽을 돌던 왜선 몇 척이 이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이런! 어서 가자!”
이젠 어쩔 수 없었다. 이제는 탐망선이 넓은 바다에 확연히 드러나고 말았다. 여명을 가득 받은 노란 대나무 돛은 파란 바다에서 너무나 눈에 잘 띄었다.
타공이 돛 한 개를 더 올리며 돛줄 여러 개를 한 손에 감고 다른 손으로는 키를 잡았다. 한선은 크든 작든 대부분 돛 두 개를 쓴다. 당시 돛이 한 개인 일본 배에 비해 역풍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격군들이 죽을힘을 다해 노를 저었다. 노는 고물에 치우쳐 양쪽에 하나씩 있고, 노마다 서로 마주보며 두 명씩 달라붙었다. 임중형은 배의 무게중심을 잡기 위해 조금 앞으로 움직였다. 그곳에는 둥근 화살통이 놓여있었다.
임중형이 화살이 가득 담긴 화살통에서 몇 개를 꺼내 동개에 꽂기 시작했다. 장전 2개에 편전 6개를 골랐다. 굵고 기다란 장전은 보기만 해도 든든했다. 가늘고 짧은 편전은 애기살이라는 이름과 달리 차갑고 날카로운 기운을 내뿜었다.
임중형은 동개를 어깨에 맨 다음 허리 뒤로 돌렸다. 그리고 활줄을 힘주어 홱홱 당겨보았다. 썩 좋은 상태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다.
수군이 각궁을 간수하기란 쉽지 않았다. 매일 밤 활을 풀어 보관했다가 출동하기 전에 숯불을 피워놓고 이리 저리 구부려 활을 다시 얹기는 하지만, 매일같이 바다에 있다보니 짠바람이 들어 활은 늘어지기 일쑤였다.
“어떻게 된 거냐? 어서 저어라!”
뒤를 돌아본 임중형이 놀라 소리 질렀다. 왜 경비선들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나름대로 빠르다고 자부하는 탐망선이었지만 세 방향에서 몰려드는 왜선들을 뿌리치고 도망가기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키잡이가 돛을 잡아당기면서 비명을 질렀다.
“저것들 배가 너무 빨르당께요!”
“바람 탓이야! 순풍에는 왜선이 더 빨라. 어서 저어!”
임중형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바람은 이때 하필 북서쪽으로 불고 있었다. 덕택에 전라우수영에 더 빨리 갈 수는 있겠지만 임중형은 과연 여기서 살아남아 우수영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돛이 한 개이며 선형이 뾰족한 왜선은 순풍을 받으면 조선 배보다 더 빨랐다.
새벽안개가 바람 따라 슬며시 산으로 움직였다. 탐망선과 일본 경비선 다섯 척은 빠른 속도로 울돌목 쪽으로 달려갔다. 배 밑으로 푸른 파도가 하얗게 갈라졌다. 어느덧 수평선 구름 위로 황금빛 해가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어여차! 어여차!”
바닷물에 거의 수직으로 꽂힌 노가 끝없이 찌그덕거렸다. 격군들은 제한몸 살기 위해서라도 죽어라 노를 저었다. 격군들이 외치는 구령이 노 젓는 움직임을 따라가기 벅찰 정도였다.
임중형은 이 정도면 아슬아슬하게 척후장의 판옥선이 있는 곳까지 갈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품었다. 조계종이 울돌목 입구에 제대로 있기만 하다면.
임중형은 통아 줄을 왼손가락에 매면서 준사가 하는 꼴을 지켜보았다. 항왜치고는 조선 노를 꽤 잘 젓는 편이었다. 언뜻 듣기로 준사 아버지가 젊었을 적에 해적이었던가 하는 것 같았다.
- 파앙!
갑작스런 총성에 놀란 임중형이 움찔했다. 일렬로 늘어선 섬들 사이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며, 그 아래로 왜선이 보였다. 왜군도 놀랐는지 덮어놓고 우선 한 방 쏜 모양이었다.
“중마도에 왜 소선입니다!”
“진도 쪽으로 붙여! 벽파진까지만 가면 척후장이 있다. 다들 힘 내!”
왜선 다섯 척이 뒤따라오는 가운데 옆에서 다른 왜선이 나타난 것이다. 격군들은 젖 먹던 힘까지 짜냈지만 거리는 점점 더 좁혀졌다.
손가락에 골무를 낀 임중형이 왜선을 노려보았다. 준사가 고바야라고 부르고 조선수군들은 소선이라 부르는 왜선에서 나지막한 나무방패판으로 몸을 가린 노꾼들 사이로 왜병들이 조총을 겨누고 있었다. 거리는 400걸음武 정도, 즉 200보步였다. 이 거리에선 편전을 쏘면 충분히 맞힐 수 있지만 조총은 아무리 쏴도 목표를 맞힐 수 없다는 것을 임중형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 피잉!
작은 화살은 빠른 속도로 날아가 금세 시야에서 사라지고 짧은 통아만 왼손가락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임중형이 다시 잽싸게 화살을 시위에 매겼다.
- 탁!
화살은 방패판에 맞고, 화들짝 놀란 왜병들이 고개를 숙였다. 임중형은 다른 왜선을 향해 편전을 쏘았다. 작은 대롱을 통과한 애기살이 황금빛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왜선 안으로 사라졌다. 그 직후에 비명이 들려왔다.
“하이고! 군관 나으리. 살리주씨요.”
늙은 키잡이가 임중형을 바라보며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바닷바람에 찌들고 햇살에 탄 타공의 얼굴은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이 전쟁만 없었다면, 최소한 지방 수령과 아전들의 토색질만 없었다면 10년은 더 젊어 보였을 것이다.
“방향이나 제대로 잡게! 기슭에 바짝 붙여!”
타공이 키를 조금 왼쪽으로 돌렸다. 탐망선은 진도의 금남산 아래를 지나가고 있었다. 임중형이 고개를 홱 돌렸다.
왜선들은 여전히 빠른 속도로 쫓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해안에 숨어있을지도 모를 조선군의 포격을 겁내는지 해안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했다. 거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한 발씩 쏘는 임중형의 편전도 왜선의 접근을 막았다. 그러나 격군들은 눈에 띄게 지쳐갔다. 온몸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입으로는 하얀 입김을 내뿜었다.
그러나 격군들은 미친 듯이 노를 저었다. 피로가 지나쳐 고통으로 변한 지 오래였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를 넘어설 정도는 아니었다. 낯빛이 하얗게 변한 격군들은 뭐가 더운지 옷을 하나씩 벗어제끼면서 열심히 노를 저었다.
“나으리! 어란포에서 왜선들이 나옵니다. 바다를 새까맣게 덮었어요!”
젊은 격군 해돌이가 뒤돌아보면서 외쳤다. 임중형이 추격중인 왜선들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해돌이 말처럼 수백 척이 어란포 앞바다에서 나와 천천히 북상하고 있었다.
임중형은 아군 전선을 찾았다. 그러나 척후장 영등포만호의 판옥선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해가 떠올라 물결이 반짝반짝 황금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파도를 헤치며 탐망선이 쏜살처럼 달렸다.
‘어디 숨었나? 아니면 도망갔나! 총소리가 들리면 바로 달려와 줘야 할 것 아닌가! 자기 부하 아니라고 잊어버린 건가?’
임중형이 이를 갈았다. 임중형의 배는 척후장이 지휘하는 탐망선이 아니라 통제사가 탑승하는 상선上船 직속의 별망선이었다. 척후장 조계종이 부리는 탐망선들은 어제 밤새 왜 수군 척후선들과 숨바꼭질하다가 결국은 한 척도 초계선을 넘어서지 못했다. 오히려 설 건드려 왜 수군의 경계만 강화시켰을 뿐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임중형의 별망선만 간신히 숨어들어 왜선 집결지를 염탐할 수 있었다. 임중형이 어란포를 정찰했던 아흐레 전에 비해 경비가 무척 강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가 본 것은 지금처럼 넓은 바다를 가득 덮은 왜선의 대함대였다.
이젠 무슨 일이 있어도 우수영으로 돌아가야 했다. 어서 돌아가 왜선이 엄청난 숫자로 모여 이미 출발했음을 알려 통제사에게 후퇴하도록 건의해야 했다. 어란포에 모인 왜선이 50척에서 많아야 200척 사이로 알고 있는 이 통제사는 크나큰 실책을 범할 뻔했다고 임중형은 생각했다.
‘통상은 패하면 절대 안돼. 이순신 영감마저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조선은 완전히 무너져버릴 거야.’
7월의 칠천량 패전 이후 8월에는 남원성이 함락되고 전주성이 떨어졌다. 9월 들어 조선 땅에 얼마 안 남은 명군은 충청도 북쪽 끝인 직산에서 왜군에게 패해 수원을 지나 서울로 도망쳐버렸다. 서울은 지금 피난 가느라 아우성이라고 들었다.
그런 마당에 수군이, 그것도 이 통제사가 지휘하는 조선수군이 패한다면 이 전쟁은 절망적이었다. 왜 수군은 서해를 거슬러 한강을 타고 서울을 직접 공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 천진에 상륙해 바로 옆의 북경을 공격할 수도 있었다. 그럼 명나라는 북경 방어에 급급해 조선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조선군은 절대 안 믿고 명나라 군대를 천병이라 떠받드는 왕은 황망히 명나라로 도망쳐버릴 것이다. 그럼 이 땅에 남은 백성들은 어떻게 된단 말인가?
“뎃포구미 요이!”
일본말이 분명한 외침에 놀란 임중형이 반사적으로 활시위에 애기살을 매기며 몸을 돌렸다. 왜선에 탄 왜군들이 이쪽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 사이에 이렇게 접근했다니!
“군관 나으리! 왜놈들이!”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임중형이 활시위를 놓는 순간이었다.
- 타타탕!
굉음과 함께 앞서 따라오는 왜선 세 척에서 동시에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활을 쏘자마자 직감적으로 화살이 빗나갔음을 알아차린 임중형이 장전을 꺼내 시위에 매겼다.
“일어나서 노를 저어! 머리 숙이고 있다가 그냥 맞아 죽을 거야?”
임중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총소리에 놀란 격군들이 뱃전에 엎드려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준사만이 홀로 노를 젓는데, 그래도 배는 물결에 흘러가는 정도 빠르기밖에 되지 않았다. 물살 흐름은 어느새 바뀌어 울돌목으로 향하는 순류가 되어 있었다.
“빨리 일어서!”
장전을 날린 임중형이 격군들을 발로 찼다. 정신을 차린 격군들이 겨우 일어서는데, 노를 저으면서도 연신 뒤돌아보기를 멈추지 않았다. 왜선에서는 왜병들이 다시 장전하는 중인지 다행히 조총을 쏘지는 않았다. 그 사이에 임중형이 연달아 화살을 날렸다.
“허억!”
노를 젓다가 방패판 사이로 몸을 드러낸 왜인 하나가 옆구리에 화살을 맞았다. 왜인이 옆으로 거꾸러지며 물에 빠지려는 순간 다른 왜병 두 명이 그를 붙잡아 끌어 방패판 옆에 숨겼다. 임중형이 그들에게 화살을 날렸지만 빗나가고 말았다.
“전쟁에서는!”
임중형이 화살통을 집어들고 뱃전에 화살을 모두 쏟아버렸다. 장전을 집어든 임중형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두려움을 이겨내는 놈만 살아남는단 말야!”
- 피융!
- 탁!
흔들리는 배에서 움직이는 목표를 맞추기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역시 지금처럼 나무방패에 화살이 맞을 확률이 더 컸다. 그러나 임중형은 다시 연달아 활을 쏘았다. 양쪽에서 노를 젓는 해돌이와 준사의 얼굴 사이로 화살이 날아갔다.
- 피융!
- 탁!
“머리만 처박고 오돌오돌 떨기만 하다가 죽은 놈들이 얼마나 많았어?”
- 피융!
“우와악!”
장전을 마치고 이쪽을 향해 총을 겨누려던 왜병 하나가 화살에 맞고 뱃전에 그대로 쓰러졌다. 나머지 왜병들은 놀라지도 않고 무릎을 꿇으며 조준했다. 그들이 겨눈 조총의 기관부 위로 심지가 타들어 가고 있었다. 격군들이 그 모습을 보고 엎드리려고 했다.
“저어! 서서 노를 저으란 말야! 무섭다고 멈추면 다 죽어!”
우물쭈물하던 격군들이 눈을 질끈 감고 노를 저었다. 이상하게 왜병들은 총을 쏘지 않았다. 임중형이 다시 한 발을 쏘았으나 화살은 왜병들 사이로 지나가 버렸다.
“요이이~”
임중형은 잽싸게 화살을 매기며 소리를 낸 자를 찾았다. 두 번째로 따라오는 왜선에 갑옷을 입은 젊은 왜장이 칼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임중형은 왜장이 하나 뭐라고 외치는 것과 거의 동시에 화살을 쏘았다.
- 타타타탕!
“아악!”
비명은 탐망선에서 들렸다. 임중형이 실눈을 뜨고 왜장이 탄 배를 노려보았으나 연기에 가려 잠시 보이지 않았다. 타공이 울부짖는 소리가 뱃전을 메웠다.
“여보게, 해돌이!”
준사 반대쪽 노를 젓던 격군이 물에 빠졌고, 잠시 후에 등이 먼저 물위로 떠올랐다. 붉은 피가 푸른 물에 천천히 번져나갔다. 천한 관노비로 태어나 20여 평생을 전라좌수영 영노로 살아오며 6년 동안 격군으로 수군에 복무한 해돌이의 죽음이었다. 격군들은 해돌이 이름을 안타깝게 부르면서도 계속 노를 저었다.
“감부섬 사이로 들어가면 바로 벽파진이다. 척후장이 있을 거야!”
임중형이 재촉하지 않아도 격군들은 죽어라 노를 저었다. 키를 고정시킨 타공도 격군들과 함께 노를 잡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왜선들이 잠시 따라오지 않고 멈춰 서 있었다. 다른 곳에 있던 왜선들도 한 곳에 몰려들었다.
임중형은 무슨 일인가 지켜보았다. 갑옷을 입고 뿔 달린 투구를 쓴 왜장들이 다른 배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뭐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모습이 마치 왜군들이 서로 말다툼하는 듯했다. 왜선끼리 서로 뱃전을 밀어붙이기도 했다. 그 사이에 각 배들의 수부들과 병사들은 바다를 향해 뭐라 외치며 창이나 갈고리로 물을 들쑤셨다.
“저, 저것들이! 해돌이를 끌어올리고 있어!”
타공이 분노 가득한 외침을 쏟아냈다. 임중형은 물끄러미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축 늘어진 시체가 갈고리에 찍혀 왜선 갑판 위로 올려졌다. 해돌이의 젖은 몸에서 바닷물과 함께 붉은 피가 뱃전을 적시며 바다로 뚝뚝 떨어졌다. 해돌이를 끌어올린 배의 왜군들이 환성을 내지른 반면, 다른 배에서는 아쉬워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왜군들이 물에 빠진 해돌이를 치료해서 살리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 배에 탄 누구라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왜군들이 무엇을 하려는지 말을 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격군들은 묵묵히, 그러나 열심히 노를 저었다.
해돌이를 끌어올리지 못한 왜선들은 다시 탐망선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까보다는 거리를 두고 조금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왜선들이 끝없이 탐망선을 포위하려고 시도했다. 왜선의 움직임이 빨라 언제 따라잡거나 조총을 쏘아댈지 모를 일이었다.


= 고바야, 오니에몬

“와아!”
“우헤헤! 쏘기는 지이 수군이 쐈는데 목은 우리가 건졌어.”
“무슨 소리야? 우리 철포에 맞았어. 다카도라 수군은 엉터리거든!”
왜병들과 수부들이 갑판에 끌어올려진 조선인 시체에 몰려와 시체와 다른 배들을 번갈아 보며 소리를 질렀다. 왜병들은 다른 배의 왜병들을 놀리며 신이 났다. 비록 전초전이긴 하지만 이 시체는 이번 전투에서 구루지마 수군이 거둔 첫 전과였다.
“잘했어! 우리가 해냈어! 우린 구루지마 해적의 선봉이고 전 일본수군의 선봉이니까. 하하하!”
이 배를 지휘하는 무사 오니에몬鬼衛門은 뿔이 옆으로 길게 달린 투구를 흔들어대며 과장되게 웃었다. 그리고 부하들이 첫 전과를 확인하며 뿌듯해하는 기분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시간을 주었다. 도도 다카도라 휘하의 배들은 다시 조선수군의 배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안 그런 것 같던데 이놈들도 앞머리를 정수리까지 밀었네?”
“당연하지. 안 그러면 머리 가려워 어떻게 살겠어?”
왜병들은 뭐가 신기한지 조선수군 시체를 손가락이나 창끝으로 쿡쿡 찔렀다. 옷을 벗기거나 겨드랑이 털을 잡아당겨 뽑기도 했다. 그리고는 괜히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이를 드러내고 웃어댔다.
이들이 조선인 시체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두 달 전에 칠천량해전에 참가했지만, 그것도 선봉으로 싸웠지만 이들은 조선군 얼굴도 못 보고 말았다. 한참 조선수군 배들을 쫓아다니다 이상하게 시시하게 끝나버린 다음에는 판옥선이라는 커다란 조선수군 전선들만 빈 갯가에 놓여있을 뿐이었다. 전과는 단 하나도 올리지 못했다. 이들은 그때 육지에 있었던 시마즈군 일부가 얼떨결에 잡은 조선수군들을 참획하고 얻은 머리 몇 개만 봤을 뿐이었다.
“됐다. 자! 이제 비켜라.”
오니에몬이 병사들을 손으로 밀어내며 큰칼을 뽑았다. 큰 환도 한 자루를 차는 조선장수와 달리 일본 무사는 다찌라 불리는 큰칼과 고다찌라 불리는 작은칼을 동시에 찬다.
오니에몬이 다찌를 높이 들어올리자 피가 옷에 튈까봐 물러서는 병사가 서넛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자세히 구경하려고 다가들었다. 평소에는 노를 젓지만 전투시에는 병사나 다름없는 구루지마 해적의 수부들도 몰려들었다.
“하앗!”
오니에몬이 칼을 내리치자 피가 확 튀며 시체의 머리가 잘렸다. 잘린 머리는 옆으로 굴렀고, 병사 하나가 상투 풀린 머리칼을 쥐어 머리를 오니에몬에게 주었다. 머리가 잘린 시체의 목에서 붉은 피가 콸콸 쏟아졌다. 그 피에서는 하얀 김이 올라왔다.
칼을 닦고 칼집에 넣은 오니에몬이 머리를 들어올렸다. 붉은 피가 목에서도 뚝뚝 떨어졌다. 오니에몬이 머리를 치켜들면서 크게 외쳤다.
“우린 이겼다! 이 목을 하타 노부도키 님께 가지고 간다!”
“와아!”


= 해남현 성산, 척후군관 임준영

임준영은 말을 탄 채 언덕에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멀리 탐망선과 왜선들의 경주가 계속됐고, 어란포 쪽 바다에는 왜선들이 바다를 뒤덮으며 올라오고 있었다. 가끔 이어지는 총소리가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들려왔다.
“탐망군관 임! 중! 형! 나으리가 고생하십니다.”
임준영 옆에서 노새에 타고 있는 태귀생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성이 任과 林으로 아예 다른데도 임중형과 임준영을 헷갈리는 사람이 많았다. 전 낙안군수 임계형도 통제사의 군관이고, 비슷한 이름으로 임달영도 있으니 한때 수졸과 노비들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항상 그랬듯이 태귀생은 조금 전에 어란포 근처에서 왜군들의 조총 사격을 받고 도망쳐온 사람치고는 여유가 있어 보였다. 임준영은 척후를 무척 중시하는 이 통상 영감이 신분이 천한 태귀생을 정탐인으로 뽑은 이유가 거기에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태귀생은 전라좌수영 소속 도장刀匠인데, 칼 만들기도 잘했지만 적에게 붙들리지 않고 적진을 종횡무진 잘도 돌아다니는 사람이었다.
이순신은 함대 내 서열 2위인 무장은 중군장 또는 중위장에, 서열 3위는 척후장에 임명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쯤은 임준영도 눈치 채고 있었다. 임진년 이후 전라좌수영의 중군장에는 순천부사 권준, 우척후장에는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 하는 식이었다.
칠천량 패전 이후 척후장으로 임명된 조계종은 서열은 낮지만 이순신이 무척 신뢰하는 장수였다. 지금이 조선수군에게 극도의 위기상황인 만큼 이순신은 이번만큼은 서열보다는 신뢰에 의지하는 듯했다.
“흠! 꽤나 덥겠군.”
임준영도 호기를 부렸다. 그러나 꾸역꾸역 몰려드는 왜선을 보면 마음이 착잡했다. 아무래도 통상 영감은 울돌목에서 싸우다 죽으려고 작정한 것 같았다. 임준영은 드디어 이 황량한 바다에서 뼈를 묻는구나 싶었다.
“나으리! 제가 먼저 우수영으로 뛰어갈깝쇼?”
“아니다. 조금 더 지켜보자. 그런데 도대체 저 왜선들은 꼬리가 안 보이는구나.”
“그렇습죠. 어란포에서 제가 센 것만 해도 5백 척이 넘습니다.”
“흐음. 큰일이야.”
임준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태귀생은 자꾸 임준영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나으리. 나으리가 새로 정탐하신 것이 있습니까?”
“그래. 역시 안 좋은 소식이다. 회령포에 300척이 더 있더라.”
“흐에엑!”


= 탐망선, 탐망군관 임중형

어느새 탐망선은 진도의 연동을 지나가고 있었다. 추격해오는 왜선들은 한 척이 줄었지만 여전히 열심히 탐망선을 따라왔다.
#갯가 마을 초가집 지붕에 누런 호박이 열려 있고, 강남으로 떠날 제비들이 수백 마리나 모여 지저귀고 있었다. 깊은 가을이었다. 그때 타공의 비명이 임중형의 상념을 날려버렸다.(이 급할 때 상념?)
“벽파진에도 왜선이다! 척후장의 전선은 없어요!”
“으아!”
정면에서 갑자기 나타난 일본 배가 이쪽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었다. 연달아 총소리가 울리고, 왜선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기겁한 격군들이 앞뒤를 번갈아 보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송도 쪽으로 돌려! 영등포만호 이 자식은 어디 있는 거야? 내가 여기서 살아나가면 조계종 그 개자식 반드시 죽여버릴 거야!”
임중형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타공이 키를 돌려 넓은 바다 쪽으로 배를 틀었다. 그러나 꼼짝없이 포위된 것 같았다. 왜선에 비해 속도가 빠르지 못한 탐망선이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 앉아서 죽을 수는 없었다.
“빨리 저어!”
임중형은 좀더 가까운 뒤쪽 왜선을 향해 연달아 화살을 날렸다. 왜선들은 도주로를 차단한 다른 왜선의 출현을 보고는 여유 있게 천천히 접근해왔다. 왜선 한 척은 혹시나 탐망선이 진도에 상륙할까봐 해안으로 접근하고, 아니면 해남 땅으로 도망갈까봐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배도 있었다. 어찌 됐건 탐망선을 포위한 다음 조선수군들을 사로잡거나 조총 일제사격 한 방에 끝낼 작정인 것 같았다.
“이젠 다 틀려부렀어요. 척후장 이 나쁜 놈 같으니라고.”
타공이 중얼거리며 임중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임중형은 타공 말에 신경 쓰지 않고 앞에 나타난 왜선만 쏘아보았다. 임중형의 시선이 천천히 감부섬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이상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
“척후장이다! 영등포다!”
임중형이 외치자 격군들이 환호성을 올렸다. 섬그림자에서 막 벗어난 판옥선이 아침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앞에 나타난 왜선은 영등포만호 조계종의 판옥선에 쫓기던 중이었다. 그래서 조금 전에 왜선이 총을 쐈어도 이 근처 바다에 총알이 떨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저어! 노를 저어!”
임중형이 재촉하지 않아도 격군들은 힘차게 노를 젓고 있었다. 타공이 판옥선을 향해 키를 돌리고 돛줄을 당기느라 부산해졌다. 반면에 탐망선을 쫓던 왜선들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영등포 선이 잠시 속도를 늦추고 방향을 돌리자 좌현이 천천히 드러났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분명했다. 임중형과 격군들은 신이 나서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쏜다!”
- 꽈광! 꽝!
- 우지끈! 빠바바바박!
표적이 된 작은 왜선에 차대전 두 발이 명중하고 그 직후에 조약돌이 뒤덮어버렸다. 현측에 커다란 구멍 두 개가 뚫리고 왜군들은 단단한 조약돌에 얻어맞고 뱃전에서 나뒹굴었다. 왜선 주변에 작은 물기둥이 수없이 치솟아 올랐다.
온통 시뻘겋게 피칠이 된 왜선은 천천히 물이 차 올라 반쯤 가라앉았다. 첫 번째 공격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수부 몇 명이 물로 뛰어들었다. 그 순간 판옥선에서 다시 불꽃이 번쩍거렸다. 이번에는 단 한 방이었다.
- 뻥!
- 촤차차차착!
보이지는 않지만 저 소리가 뭔지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방패판이 부서져나간 왜 소선을 수없이 많은 작은 화살들이 휩쓸어버린 것이다. 화포에서 발사되는 화살이었다. 판옥선에 늘어선 사부들이 따로 활을 쏠 필요도 없었다.
판옥선과 별망군의 탐망선이 부서진 고바야에 천천히 접근했다. 움직임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갑옷 세 군데에 난 구멍에서 피를 질질 흘리는 왜군이 기를 쓰고 뱃전을 기었다. 그 왜병의 손이 천천히 하늘을 향했다. 그러더니 어느덧 손을 힘없이 툭 떨어뜨렸다.
“와아!”
탐망선의 격군들이 함성을 질렀다. 판옥선에 탄 사부와 포수들이 깃발을 흔들며 탐망선의 함성에 답했다.
임중형이 뒤를 돌아보니 그 동안 탐망선을 추격하던 왜선들이 일제히 꽁무니를 내빼고 있었다. 속이 다 시원했다.


2. 이른 아침


= 도도 다카도라 함대 어립선, 도도 다카도라

“그럼 지금부터 군의軍議를 시작하겠소.”
파란 바다를 온통 뒤덮으며 나가는 5백여 척의 일본함대. 그 중앙에 위치한 상자 모양의 큰배에서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가 묵직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얼굴이 둥글넓적한 다카도라는 부처님처럼 큰 귀, 그리고 얼굴 절반을 덮은 큰 코와 함께 사람 좋은 인상을 하고 있었다. 다만 사람 팔 길이보다 더 긴 나뭇잎 모양의 투구 장식이 무척 부자연스러웠다.
뱃전에 각종 깃발을 들고 도열한 병사들 사이로 방금 떠난 어란포가 점점 멀어졌다. 해도海圖에 魚卵浦로 기록된 이름과는 달리 물고기 알과는 전혀 닮지 않았다. 다카도라가 전에 본 다른 해도에는 於蘭浦로 쓰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포구로서는 어쨌든 훌륭했다. 빙 둘러선 작은 산들이 바람을 막아 주었고 바다 쪽으로 넓은 출구가 있었다.
“모두 앉으시오.”
탁자에는 아카구니赤國, 즉 전라도의 복잡한 해안선과 무수한 섬들을 그린 해도 등 회의에 필요한 물건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가장 상석인 총대장 자리의 접의자에 앉은 다카도라가 각 함대에서 모인 무장들을 한번씩 쳐다보았다. 화려한 갑옷과 투구 안에 들어있는 상기된 표정과 신중한 표정이 그의 눈동자에 번갈아 들어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지도를 보고 #상상에 빠지면서(생략하는 것이 좋을 듯.) 팔도를 여러 가지 색깔로 칠해 마음대로 고쳐 부르고 있었다. 전라도는 아카구니, 충청도는 아오구니靑國, 경상도는 시로구니白國 등이다.
“조선수군이 지금 아카구니 우수영 앞 바다에 모여 있다 하오. 이건 우리와의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행동이오.”
이른 아침이었다. 음력 9월 하순의 싸늘한 바닷바람과 부드러운 배의 흔들림이 느껴지는 가운데 다카도라는 ‘일전一戰’이란 말에 특별히 힘을 주었다. 그를 비롯해 지금 모여있는 일본의 수군장수 모두가 기다려 마지않던 순간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조선정벌을 시작한 이후로 그들이 무엇보다 두려워했던 조선수군을 영원히 사라지게 할 전투였다.
그러나 다카도라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뒤쪽에는 도도 가문을 나타내는 군기가 위용을 뽐내며 펄럭였지만 반대로 마음속에서는 불안감이 요동쳤다.
도대체 이 불안감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다카도라는 우선 회의에 참석한 무장들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바로 오른쪽에 비장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구루지마 미치후사부터 가장 왼쪽에 시큰둥한 표정을 짓는 하치스카 이에마사까지.
“드디어 원수를 갚을 기회가 왔소.”
구루지마 미치후사來島通總가 나직이 말하며 눈빛을 빛냈다. 도도 다카도라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미치후사가 놀라면서 고개를 숙였다. 하마터면 다카도라의 기다란 투구 장식에 부딪칠 뻔한 것이다. 그건 하치스카 이에마사도 마찬가지였다.
미치후사가 헛기침을 하더니 강한 어조로 말했다.
“이순신의 목은 이 미치후사가 베겠소!”
적어도 일본수군 내에서 구루지마 수군의 능력을 의심할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37세란 젊은 나이였지만 항해능력이나 해상에서의 전투력만은 능히 천하제일이라 불리는 미치후사였다. 물론 일본인에게 천하란 일본을 뜻한다.
미치후사가 많은 무장들이 모여 있는 앞에서 큰소리 쳤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드러내놓고 반박하지 않았다. 다만 왼쪽에 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板安治가 냉정하게 대꾸했다.
“그야 선봉을 맡은 만큼 당연한 것이오. 다만 여의치 않을 경우는 내가 나서서 이순신을 박살내 주겠소.”
둘 사이에 싸움이 나기 전에 다카도라가 끼여들었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일본의 무장들, 그것도 다른 누구에게 명령받는 것을 무척 거슬려하는 수군무장들이었다.
“두 분의 결의는 잘 알겠소. 그러나 지금 이 자리는 그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을 어떻게 격파할까 논하는 자리요. 다른 장수도 아니고 이순신이오. 구체적인 방책을 내놓는 것이 중요하오.”
사실 수군 총대장이라는 직책은 다카도라가 감당하기에 조금 부족한 감이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영지의 크기나 실력 면에서 다카도라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무장들도 있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각별한 신임을 얻고 있는 다카도라가 통솔 책임을 지고 총대장이 됐고, 다른 무장들은 형식상이나마 명령을 들어야 하는 부하의 위치가 됐다. 따라서 무장들의 의견을 조율하고 때에 따라서는 명령을 내려야 하는 다카도라 입장에선 약간 어색함을 느끼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순신이나 조선수군이 문제가 아니지 않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임무는 북쪽에 있는 육군에게 보급을 해 주는 것이고, 그 다음은 내 병력을 상륙시키는 것이오. 듣자하니 저기 모인 조선수군이라 해봐야 고작 열 척 남짓이라는데 무엇이 문제겠소? 단숨에 격파하고 올라갑시다!”
물론 전부가 명목상이라도 다카도라의 부하는 아니었다. 지금 기세 좋게 말을 꺼낸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가 바로 그랬다. 새빨간 갑옷 가운데에 그린 황금색 원이 떠오르는 태양에 눈부시게 빛났다. 다카도라는 잠시 눈을 찡그렸다.
이에마사는 수군과 함께 왔지만 전투가 아닌 수송책임을 지고 있었다. 비록 연합함대 편성상 본진 병력에 속해 있어도 영지의 크기나 실력에서 오히려 다카도라를 훨씬 능가했다. 협력이라면 몰라도 다카도라에게 명령을 들어야 할 의무는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간혹 다카도라의 지휘능력을 믿을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 말 대로요! 이빨 빠진 호랑이나 다름없는 조선수군이 상대나 되겠소? 겨우 열 몇 척 잡는데 뭐 그리 특별한 방책이 필요하겠소? 그저 다시 한번 결의나 다지면 족하다고 생각하오.”
군감軍監 모리 다카마사毛利高政가 이에마사 말에 적극찬성하고 나섰다.
군감이란 무장들의 전투를 감시하고 그 전과를 히데요시에게 보고하는 직책이다. 다른 말로 이쿠사메스케軍目付 또는 부교奉行라고 불렸지만 나쁘게 말하면 본진 안에 있는 감시자였다. 그가 히데요시에게 보내는 보고서 내용여하에 따라 본국으로 소환 당하는 것은 물론 처벌까지 각오해야 했다.
“다른 의견은 없소?”
답답해진 다카도라가 조금 목청을 높였다. 정말로 아무 것도 문제되는 게 없는 걸까? 지금 느끼고 있는 불안감은 단지 기우杞憂일 뿐일까?
“내 생각은 좀 다르오.”
한마디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있던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십여 척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나 그 조선수군을 지휘하는 자는 귀신같은 장수인 이순신이오. 함부로 깔보다가는 분로쿠文祿 원년처럼 큰 화를 당할 수도 있을 거요.”
요시아키는 다른 무장과 달리 신중하고 사려 깊은 성격이었다. 별다른 장식 없이 금과 은으로 상감된 스페인 식 투구도 아직 젊지만 차분한 그의 성격과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요시아키는 행동하기에 앞서 항상 생각을 먼저 했다. 때문에 용맹스럽다는 말은 별로 듣지 못했어도 큰 실패와 패배를 겪지 않았다.
“쓸데없는 걱정이오.”
야스하루가 눈살을 찌푸리며 요시아키의 말을 부정했다. 야스하루는 손자를 달래는 시골노인 같은 요시아키의 부드러운 표정과 말투에 더 화가 난 것 같았다.
“싸움은 장수 혼자서 하는 게 아니란 걸 요시아키 님도 아실 거요. 이순신이 병법에 밝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구체적으로 그 병법을 실행할 전력이란 게 없지 않소?”
칠천량에서 승리한 다음 일본수군은 견내량을 통해 경상도 서부와 전라도 해역으로 물밀듯이 진출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조선수군은 전혀 저항을 하지 않았다. 조선수군의 주력을 칠천량에서 패주시키긴 했지만 이 정도로 무인지경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해 오히려 일본수군이 더 당황할 정도였다.
포구마다 한두 척씩 세워진 빈 판옥선을 불태우거나 일본 땅으로 보낸 일본수군은 8월 중순에는 남원성 공략전에 참가하는 여유를 부렸다. 그곳에서 수군 무장들은 이순신이 다시 통제사가 됐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다. 그래서 거의 한 달 동안 조심스런 탐색전을 펼쳤지만 뜻밖에 조선수군은 겨우 10여 척에 불과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거의 100척에 가까웠던 거대한 판옥선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조금 믿기 어려웠지만 조선인 포로와 부역자들을 통해 얻은 정보로 미뤄볼 때 이순신 밑에 겨우 열 척 남짓밖에 없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일본 수군장들은 나머지 판옥선들은 아마도 서울을 지키기 위해 강화도로 북상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도저히 계산이 나오지 않았다.
“글쎄요.”
요시아키는 야스하루의 눈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다카도라는 그 부드러운 표정을 보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야스하루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야스하루 님이 용인에서 5만의 조선군을 무찔렀을 때 거느린 수백 명에 비해 지금의 조선수군이 적다고 생각하시오?”
“그, 그건...”
순간 당황한 야스하루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늘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는 무공武功과 방금 한 말의 모순을 요시아키가 정확히 지적했기 때문이다. 다카도라가 듣기에도 분명 맞는 말이었다.
전쟁 첫해 수원 근처에서 방심한 조선군 5만을 향해 야스하루는 겨우 천여 명의 병력으로 돌격을 감행했다. 그 공격은 멋지게 성공했고, 설마하던 조선군은 서로를 짓밟으며 도망쳐버렸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숲 속에서 반격하려고 아침식사를 준비하던 조선군을 한 번 더 공격해 산산이 흩어버렸다. 완벽한 승리였다. 그래서 야스하루는 수백으로 5만을 무찔렀다는 명예를 얻었다. 그러나 우리편에게 실제 가능했던 일이 적에게 특별히 불가능할 것은 없다.
“우리가 그 따위 조선군과 같소?”
야스하루가 눈을 부릅뜨고 쏘아보았다. 그러나 요시아키의 나지막한 한 마디에 야스하루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견내량해전을 빼면, 우리 수군은 조선군보다 못하지요.”
그 말에 다른 무장들도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아무리 싸움 못하고 도망 잘 가기로 유명한 조선군이었지만 진주성이나 행주에서는 훨씬 많은 병력을 동원한 일본군에 뼈아픈 일격을 가했다. 그리고 일본군이 서울을 내주고 부산으로 후퇴한 것은 명나라 군대 때문이 아니라 의병이라는 도둑들의 난동에 의한 식량부족 탓이었다. 육지의 조선군도 때에 따라서는 제구실을 했다는 뜻이다.(내용이 대사와 어울리지 않는 듯. 야스하루의 대사를 보충하려는 의도라면, 조선육군이 엉망이어서 손쉽게 무찔렀지만 해군은 그렇지 못하다...라고 설명이 연결되는 것이 매끄럽지 않을까?)
그러나 일본수군은 압도적인 전력으로도 이순신의 함대를 무찌르지 못했다. 한번도 이기지 못하고 처참한 패배만 연속 당했을 뿐이었다. 그것은 5년 동안 일본수군에게는 처절한 악몽이었다. 일본 땅에서는 수군으로 징발되면 절대 살아 돌아오지 못하는 것으로 여기는 풍조가 만연했다. 그래서 일본수군이 조선육군보다 못하다는 요시아키의 말은 맞았다.
당장이라도 승전할 것처럼 들떠 있던 분위기가 갑자기 착 가라앉았다. 이 분위기에 쐐기를 박듯 요시아키가 문제를 제기했다.
“우린 아직 이순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고 있소.”
“과연 그렇소! 나도 요시아키 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하오.”
그제야 다카도라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의 근원이 어디서 온 것인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즉시 요시아키 말에 찬성하며 그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이순신은 아무런 확신도 없이 일전을 벌일 정도로 우둔한 무장이 아니오. 분명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을 거요. 그게 무엇인지 알아내 철저히 분쇄해야 하오.”
기세는 등등했지만 따지고 보면 이 자리에 있는 수군장수 모두가 이순신에게 철저히 패해 병력과 함대를 모조리 잃어버린 경험이 있었다. 좀 과장해서 조선수군은 무섭지 않아도 이순신만은 꿈에 나타날까 두려운 존재였다. 다카도라는 불안감의 원인을 찾았다. #그것은 다시 통제사로 임명돼 조선수군을 이끌고 있는 ‘이순신李舜臣’ 이라는 이름이었다.(불안감의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 어색하다. 이미 이순신이라는 이름 자체가 여러 번 앞에서, 그것도 자기 입으로 언급했었는데 이제야 불안감의 원인이라는 게 맞지 않음. 앞쪽에서 다카도라가 자기 입으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을 무찌르고 어쩌고 하는 부분에서 이순신의 이름을 빼고 이야기를 진행해야 할 듯.)
비록 칠천량의 패전에 넋이 나가있는 병졸과 열 척 남짓의 배밖에 남은 것이 없다해도 이순신만은 여전히 변함 없는 이순신이다. 일본군을 상대로 싸워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그에게 조선백성들은 여전히 믿음을 가지고 따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전력에서 도저히 상대가 안 된다는 건 이순신도 잘 알고 있을 거요. 그럼에도 저곳에서 싸우기로 마음먹었다면 나름대로 어떤 작전이 준비되어 있을 거요. 신중하지 않으면 안되오.”
요시아키는 마치 두 배쯤 되는 강한 적을 상대하는 태도였다. 그러자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던 구루지마 미치후사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신중하다니! 여기서 더 얼마나 신중해야 하오? 적이 바로 눈앞에 있단 말이오. 싸우는 것 외에 뭐가 필요하오?”
며칠 동안 조선함대와 전초전을 벌인 본진 다카도라 함대 외에 구루지마 수군도 끊임없이 정찰선을 띄웠다. 그로 인해 조선수군의 움직임은 낱낱이 보고되고 있었다.
“그 싸우는 방법이 문제란 거요.”
고함을 지른 미치후사와 낮고 침착하게 답하는 요시아키가 서로 노려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적의를 느낀 다카도라는 결론을 내리듯 말을 꺼냈다. 어쨌든 다카도라는 작전회의를 주재하는 총대장이었다.
“우선 이순신이 무엇을 노리는 지 그것을 논해봅시다.”


= 도도 함대 어립선, 겐타로

“영주님들이 군의를 열고 있어. 드디어 싸움이 시작될 모양이야!”
갑판 위에서는 무겁고 진지한 회의가 열리고 있었지만 막상 그 아래 야구라矢倉에서는 활기가 넘쳤다. 특히 전투가 곧 시작될 것 같다는 소식을 들은 병사들이 그랬다. 40개나 되는 2인용 노가 달리고 수부만 80명이 넘는 대형 아다케후네安宅船 선실 안이 순식간에 시장바닥처럼 떠들썩해졌다.
갑옷과 무기를 다시 점검하는 병사도 있고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춤을 추어대는 병사도 있었다. 출렁대는 파도에 넘어지면서도 춤은 그치지 않고 계속됐다. 노를 젓는 수부들의 땀 냄새와 습기가 밴 나무의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자네는 왜 그렇게 가만히 있나?”
분위기에 걸맞지 않게 멍하니 있던 겐타로源太郞는 뒤에서 다가온 목소리에 번쩍 정신을 차렸다. 돌아본 그의 눈에 법복을 입은 기원승祈願僧이 비쳤다.
“엔메이 님!”
겐타로는 엔메이圓明라고 불리는 이 스님이 총대장 도도 다카도라의 측근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떡 벌어진 어깨에 강렬한 인상을 주는 얼굴로 중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무사에 어울릴 사람이었다. 조선정벌이 시작되기 전 첩자로서 이미 조선에 온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런 경력과 외모 때문에 이 스님이 전에는 유명한 무사였다느니, 법력을 지닌 고승이라느니 하는 말도 있었지만 겐타로는 믿지 않았다.
“다들 저렇게 들떠 있는데 자네 혼자만 이러고 있어. 무슨 사정이라도 있나?”
엔메이가 다시 물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이 겐타로에게 향했지만 부드러운 어조와 얼굴에 띠고 있는 옅은 미소는 그것이 힐책하는 의미가 아님을 알려주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허어! 자네 얼굴에는 무언가 있다고 쓰여져 있네. 말해보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뭐든지 해주겠네.”
다카도라가 존중하는 측근이기에 엔메이는 상급무사에게도 하대를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병졸인 아시가루足輕에게는 물론, 영주의 하인 직분인 쥬겐中間과 보다 격이 낮은 하인 고모노小物에게도 부드러운 말투를 썼다.
지금도 그랬다. 도도 다카도라 군에 임시로 고용된 겐타로는 정규병사인 아시가루에게 괄시를 받는 잡병雜兵, 즉 사이효였다. 배에 타고 있는 사람 중 제일 낮은 신분이기에 그는 늘 하대만을 받아왔다. 겐타로는 기껏해야 노 젓는 수부 정도에게나 하대를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수부는 병사가 아니므로.
“실은 오늘 새벽에 꾼 꿈 때문에 그렇습니다만.”
잠이 오지 않아 한참을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든 후에 꾼 이상한 꿈이었다.
“무슨 꿈인가?”
“오래 전에 헤어져 소식을 모르게 된 친구가 나타났습니다.”
“그럼 길몽이 아닌가?”
“그런데 그 친구는 불길 속에 있었습니다. 피에 젖은 몸으로 저한테 도와 달라고 손을 내밀더군요. 하지만 제가 내민 손은 친구에게 닿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뭐라고 소리쳤는데 그 말조차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런가...”
엔메이는 독경이나 축원 등도 신분 차별 없이 부탁만 하면 해주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그 중에는 해몽도 있었다. 겐타로는 약간 기대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어떤 의미인지 풀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무아미타부츠.”
잠시 생각에 잠긴 엔메이가 눈을 감으며 손으로 염주를 돌렸다. 특별히 믿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겐타로도 신불神佛에 의지하고픈 심정이었다.
“흉몽이 될 수도 있고 길몽이 될 수도 있네.”
“예? 무슨 말씀인가요?”
그러나 눈을 뜬 엔메이가 한 말은 구체적인 해몽이 아니었다.
“꿈속에서 죽은 사람이나 잊었던 사람을 본다는 건 마치 무더위가 계속되고 나면 비가 오는 것과 같은 이치야. 현실을 양陽이라 하면 꿈은 음陰이니 그것이 서로 전혀 관련이 없다고도 혹은 반드시 일치한다고도 볼 수 없네.”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엔메이 님.”
“요는 자네 마음에 달렸다는 걸세.”
“그렇군요. 예. 알겠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겐타로는 더 이상 엔메이에게 묻지 않았다. 성급하게 판단한다면 친구가 부른다는 게 자기의 죽음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었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엔메이가 굳이 마음에 달렸다고 한 이유도 이와 같을 것이다.
“지금은 눈앞의 싸움만 생각하게.”
겐타로의 이런 마음을 알았는지 엔메이는 손으로 가볍게 그의 어깨를 쳐주었다. 격려의 의미였지만, 아무리 봐도 불도를 닦는 사람보다는 무사에게 어울리는 태도였다.
“그럼 저도 엔메이 님께 한가지 보여드리겠습니다.”
우울한 기분을 전투 때까지 끌고 가고 싶진 않았다. 기분전환을 위해 겐타로는 일부러 다른 병사처럼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천에 싸서 잘 보관해 두었던 물건 하나를 꺼내 보였다.
“이건?”
“사카이에서 온 상인에게 산 겁니다.”
겐타로가 보인 것은 오오쓰쓰大筒였다. 일반병사들이 가지고 있는 철포鐵砲와 비슷한 모양이고 쏘는 방법도 같았지만 구경은 훨씬 컸다. 생산지별로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철포는 12밀리에서 16밀리 정도의 탄환이 기본이다. 그러나 오오쓰쓰는 30밀리가 넘는 탄환을 쓰기 때문에 파괴력이 엄청났다.
“귀한 건데 용케 구했군.”
“돈을 좀 많이 줬습니다. 가진 걸 다 털어서 간신히 샀죠.”
겐타로가 자랑스런 표정을 짓자 엔메이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무엇 때문에?”
“듣자하니 조선의 배는 단단해서 철포에 뚫리지 않는다 하더군요. 그래서는 전공을 세울 수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거라면 뚫리겠죠.”
겐타로는 허리에 찬 자루 하나를 풀어 탄환도 꺼내 보였다. 납과 구리 등이 적절한 비율로 섞인 데다 보통 탄환의 두 배가 넘는 크기로 인해 야전에서 적의 방패를 부수는 데 쓰이던 것이다.
“그걸로 조선의 판옥선을 뚫겠다고?”
“예. 두꺼운 나무방패도 부수는 탄환입니다. 배인들 못 뚫겠습니까?”
“그건 무리일세.”
엔메이는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입니까? 이 오오쓰쓰를 판 상인이 분명 장담했습니다. 이거면 조선의 어떤 배도 부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겐타로는 화가 치밀었다.
“그렇게 소리치지 말게. 그야 자네는 아직 조선수군과 싸워본 적이 없었으니 모르겠지. 자네뿐만 아닐세. 여기 탄 다른 잡병들도 마찬가지야. 조선의 배를 우리가 탄 배와 비슷하다고 생각해선 안돼.”
“뭐가 다르단 겁니까? 좀 클 뿐이던데요.”
“조선수군이 버리고 간 빈배를 봤을 뿐이겠지. 자네, 저기 저걸 보게.”
엔메이의 손이 선실 가장 앞쪽에 있는 대포구멍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쇠가죽에 덮인 커다란 물체가 있었다.
“저게 뭔지 아나?”
“잘 모르겠습니다.”
“다카도라 님이 이번 전투를 위해 급히 남만에서 사들인 대포일세.”
“남만의 대포라고요?”
그 당시 일본에서 남만南蠻이라면 교역 상대였던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겐타로도 몇 번 남만인을 본 적이 있었다. 파란 눈에 노란 머리를 한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그들에게 이런 무기를 산 걸까?
“남만 교역선에 실려 있던 대포야. 남만인들은 저걸 캘버린이라 부르지.”
“가루바링이라고요?”
“그래. 저 대포에 들어가는 탄환 크기는 자네가 가진 그 오오쓰쓰의 다섯 배가 넘어.”
“설마!”
겐타로가 반문했다.
“그걸로도 조선의 판옥선을 격파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네. 오오쓰쓰 정도로 될 문제가 아냐.”
엔메이는 냉정하게 겐타로에게 일러주었다. 그리고 다른 곳으로 가려는 듯 몸을 돌렸다.
“한가지 더 알려주자면...”
“뭡니까?”
“판옥선에는 한 척에 저런 대포가 수십 개나 있네. 그걸 일제히 쏜다고 생각해 보게. 당해낼 수 있겠나?”
역시 믿지 못할, 아니 믿기 싫은 말이었다. 겐타로가 다시 뭐라고 반문하려 했을 때 엔메이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겐타로는 이제까지 소중한 보물처럼 아껴오던 오오쓰쓰를 갑자기 쳐다보기도 싫어졌다. 사실이 아닐 것이다. 상인이 거짓말을 했을 리 없다. 이렇게 몇 번이나 생각을 돌리려 했지만 그렇다고 엔메이가 특별히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다.
“제길!”
겐타로는 액땜이라도 하듯 바닥에 침을 뱉었다. 파도에 맞춰 출렁이는 배와 여전히 시끌벅적한 선실. 어느새 잊고 있었던 그 친구의 이름이 떠올랐다.
“슌스케俊助...”
지금은 오오쓰쓰 따위가 아닌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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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플연재는 여기까지 입니다. 격류는 현재 공저자인 김경님씨와 함께 <정유재란>이란 제목으로 확장해서 내용추가와 수정을 거쳐 재출간될 예정입니다. 올해 9월 정도로 예상하고 있으니 기대해주시기 바랍니다
                          - 안병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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