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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lking About  :  [출간서적 맛보기] 본국검법 2부 -화풍검영-
  Name  :  안병도     * Go 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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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국검법 2부

                    - 화풍검영花風劍影 -

서기(西紀) 1560년,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일본.
폭풍우가 치던 여름날 그 곳에 한 명의 조선인이 표착(漂着)했다. 가지고 있던 모든 것과 과거의 기억마저 잃어버린 그에게 남은 것은 '성준(成俊)'이란 이름뿐이었다.
그런 준이 화려한 미모와 얼음장같은 차가움을 지닌 무사 하나기리(花切り)에게 구해진 것이 모든 운명의 시작이었다. 마치 잔잔한 호수에 일어난 파문처럼……. 피와 벚꽃을 몰고 다니던 하나기리의 삶이 변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천황가의 핏줄이란 이유로 권력의 희생물이 되려던 공주 나쯔히메(夏姬)의 삶이 변했다.
준으로 인해 벌어진 모든 변화는 급기야 일본을 정복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던 종교조직 흑련종(黑蓮宗)의 몰락을 가져오기에 이르렀다. 또한 준이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 발견한 ‘본국검법(本國劍法)'은 일본 최고의 검술가를 칭한 ‘삼검신(三劍神)' 가운데 한 명을 수도 교토에서 패배시켰다. 세상사람들은 이 사건을 ‘교토의 낙신(落神)' 이라 불렀다.
그리고 벚꽃이 다시 피었을 때…… 새로운 운명이 바람에 휘날리는 붉은 꽃잎처럼 모두에게 다가왔다.

                  제 1 화  비운의 검사

검을 잡을 때마다 나는 늘 죽음을 예감(豫感)한다. 상대가 나에게 주려는 죽음과 내가 상대에게 주려는 죽음의 교차. 그곳에서 이제까지 난 수많은 죽음을 뿌려왔다.
                                   하나기리 도리(花切り鳥)

                            - 1 -
비…….
비가 내렸다.
일본에서도 남부에다 곡창지대인 이곳 이세(伊勢)지방에 비가 내리는 것은 별로 신기한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계절은 이미 봄이었다.
흐드러지게 떨어져 내리던 벚꽃도 이제 거의 지고 있었다. 나뭇가지에 달려있을 때 한없이 아름답던 그 벚꽃도 떨어지면서 한번 그 아름다움의 불꽃을 피우고 나면 흙투성이로 변해 지나가는 사람의 발에 뭉개지고 만다. 땅바닥 위에서 죽어 가는 벚꽃잎 위에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직 18살이었던 키류(樹龍)는 벚꽃나무 아래 있었다. 섬기던 집안을 잃고 낙향한 무사인 노부시(野武士)였던 아버지는 노략질과 도둑질로 생계를 이어나가다가 끝내 죽었다. 하나뿐인 혈육이자 가족인 키류를 남기고 낯선 무사의 칼에 맞아 죽은 것이었다.
아버지는 죽었다.
그것도 명예롭지도 못한 죽음이었다. 동료 노부시들과 함께 지나가던 무사를 습격하다가 죽었다고 했다. 노부시는 삼십여 명이었고 무사는 단 한 명이었다. 그런데도 무사는 긁힌 상처 하나 입지 않았고 노부시들은 전멸했다.
‘아버지…….’
새삼 눈물을 흘리고 싶지는 않았다. 키류는 아버지가 해 준 말을 떠올렸다.
- 키류, 무사는 말이다. 어떤 상황에서 언제 죽을 지 모른다. 너도 무사의 아들이다. 그런 만큼 언제 이 아버지가 죽었다고 해도 절대 울지 말거라.
섬기던 영주가 망해서 낙향했으면서도, 그래서 겨우 도적질과 품팔이로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아버지는 항상 그렇게 말했다.
마지막 말이 무엇이었더라.
키류는 아버지가 동료 노부시들과 떠나기 직전 한 말을 기억해 내려 애썼다. 아버지는 항상 그렇듯 어디론가 한참 떠나 있다가 돌아오는 일이 많았다. 그것이 분명 좋지 못한 일임을 알지만 키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살인이나 약탈을 위해 가는 것이 분명했다. 싸움에 진 무사를 습격하고 방비가 없는 농민을 협박하는 것이 노부시들이 삶을 이어가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키류는 그런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 규슈 근처로 가게 됐다. 이번에는 아주 간단한 일이니까 금방 돌아오마. 선물 사 올 테니 얌전히 있어라.
드물게 아버지는 부드럽게 키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 이번 일만 끝나면 돈도 꽤 생길 거다. 그러면 새로 네 어머니가 될 사람을 데려오마.
고생만 하다가 병으로 죽은 어머니의 모습이 키류의 머릿속에서 잠시 스쳤다. 불쌍한 어머니……. 키류는 아직도 그 어머니를 잊지 못했다. 낙향한 아버지가 사람을 죽일 때마다 그것을 막으며 차라리 품팔이만으로 먹고살자고 흐느끼며 말하던 어머니의 모습은 키류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미 없다. 아버지도 죽었다. 키류는 이제 혼자였다.
키류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전해준 것은 아버지와 알고 지내던 겐모치(原望) 아저씨였다. 그는 아버지가 일을 맡을 때 그 중계를 해주는 일종의 알선책이었는데 키류와는 그다지 친하지 않았다. 그는 지극히 사무적인 말투로 키류에게 전했다. 그 말에는 일체의 동점심이나 위로도 없었다.
키류가 겐모치에게 물은 것은 단 하나였다.
- 그 무사는 누구였죠?
- 바로 하나기리였어. 상대가 나빴던 거야.
유일하게 겐모치가 약간의 감정을 보인 부분이었다.
키류가 잘 알겠다고 대답하자 겐모치는 돌아갔다. 혼자 남겨진 키류는 계속 벚꽃나무 아래 서 있었다.
그래. 바로 하나기리였군.
이세 사람이라면 모두 하나기리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삼검신. 검술의 천재이자 냉혹한 살인마. 그리고 여자보다 매혹적인 미모를 가진 무사. 그런데 어째서 그를 상대해야 했던 거지? 그를 죽이는 것이 과연 아버지가 말했듯 간단한 일이었을까?
물론 보통 무사라면 너무나 쉬운 일이었을지 모른다. 30명이라는 숫자와 노부시들의 단련된 칼솜씨는 결코 호락호락한 게 아니다. 그렇지만 상대가 하나기리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는, 아니 그 살인귀는 결코 30명 정도의 숫자에 질 사람이 아니다. 그는 백주대로에서 사람을 베며, 그리고도 일말의 감정조차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사람을 벤 후에 가볍게 짓는 미소를 본 사람은 모두 그를 귀신에 비유한다.
복수. 키류가 그에 대한 감정을 느낀 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하나기리의 이름을 듣기 전 키류는 아버지의 복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기리라는 이름이 나오자 그 생각은 절망감과 체념으로 변했다.
하나기리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한쪽은 삼검신에 청풍무심류라는 초일류의 검술을 익히고 독자적으로 풍신일도류를 창안해 낸 천재 검술가다. 그런데 그에 대항해 이름도 없는 노부시의 아들이 도전한다. 그런 게 승산이 있을 거라고 말한다면 지나가는 개도 웃을 일이다.
“제길!”
벚꽃나무에 기대던 등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키류는 소리쳤다. 머리위로 떨어지는 약간의 빗물과 함께 키류의 고개가 앞으로 숙여졌다.
“복수조차 꿈꿀 수 없는 상대…… 어째서 그런 상대에게 죽은 거예요! 아버지!”
눈물이 흐르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가난한 노부시의 생활, 그리고 마을사람들에게서 받은 소외감. 혼자가 되었다는 슬픔이 키류의 마음을 마구 찔렀다. 키류는 비에 젖은 벚꽃을 마구 짓밟았다.
아무 것이든 하고 싶었다. 지금으로서는 터질 듯한 마음을 도저히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키류는 천천히 벚꽃나무를 떠나 물이 조금 불어난 강둑을 보았다. 비는 별로 많이 오지 않았다. 촉촉한 봄비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였다.
키류는 강둑에 내려가 그곳에 작은 봇둑을 쌓았다. 작은 강줄기를 막고 그 안의 물을 빼내서 고기를 잡기 위해서였다. 종종 생계를 위해서 미꾸라지나 잉어를 잡아 팔기 위해 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목적과는 전혀 달랐다. 오로지 마음속에 있는 감정들을 잊어버리기 위해 하고 있을 뿐이었다. 고기가 얼마나 잡히건, 아예 잡히지 않건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봇둑을 쌓아올리면서 키류의 머릿속에서 다시 복수에 대한 생각이 꿈틀거렸다.
하나기리는 여태까지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부득이하게 죽였건 혹은 심심해서 죽였던 그는 분명 지나칠 만큼 많은 사람을 죽였고 때문에 살인귀로 불리고 있다. 꽃을 벤다는 점잖은 이름같은 건 그에게 아까울 지경이다. 차라리 인간백정이란 의미의 히토기리 정도로 불리는 게 더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그런 하나기리에게 누군가 복수하기 위해 덤벼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그에게 당한 사람은 많지만 복수하겠다고 덤비는 사람은 없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모두 지금 키류가 그랬듯이 체념했다는 말이었다. 하나기리의 그 신기에 가까운 검솜씨와 냉혹함 앞에서는 원한조차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자기 생명을 노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살려보낸 적이 없다는 하나기리다. 어설프게 복수 따위를 노리다가 실패하면 그대로 죽는다. 다시는 복수는 꿈꾸지 않겠으니 살려달라고 해봤자 죽는 것은 마찬가지다.
키류는 그 하나기리와 자기가 나란히 서서 싸우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하나기리는 아마도 그 붉은 기가 도는 흰옷을 입고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는 길고 탐스러운 흑발과 미모를 휘날리며 한 손에는 애검 미즈류를 들고 날카로운 눈매로 노려볼 것이다. 그에 비해 키류는 어떨까. 낡고 다 떨어진 옷차림에 제대로 된 검조차 없는 키류가 가지고 갈 수 있는 거라고는 죽창이나 농기구, 혹은 몽둥이 정도 일 것이다. 게다가 제대로 된 무술조차 없는 키류는 복수심만으로 마구 가지고 있던 무기를 휘두르다가 단 한번에 제압당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날아온 하나기리의 칼에 목을 떨어뜨린다. 아마 키류가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그 살인귀의 잔혹한 미소일 것이다.
절대로 불가능한가?
키류는 봇둑을 터서 물을 뺐다. 조금 후면 물이 빠진 바닥에 고기들이 나타날 것이다. 빗물에 옷과 몸이 젖으면서 추워졌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어떻게든 복수를 하고 싶다.
검술을 익혔다고 해서 그리고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제압할 수 있다고 해서 자신만만하게 아무런 주저 없이 베는 자에게 베이는 자의 고통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나에게는 아무런 능력도 없다.
물이 빠진 강둑이 드러났다. 봄이라 그런지 물고기는 거의 없었다. 그래도 몇 마리 정도의 잉어가 퍼덕이고 있었다.
무기만이라도 있다면…….
키류는 잘 드는 칼 하나 만이라도 있다면 하고 생각했다. 칼은 비싸다. 대장간 겐모치 아저씨에게 부탁해 보았자 그냥 얻을 수 있는 물건도 아니었다. 대충 아무에게나 휘두르는 검이라면 몰라도 하나기리를 상대로 싸우려면 어느 정도 수준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정도의 검이라면 고작 물고기잡이와 품팔이로 살아온 키류에게는 어림도 없었다. 집에는 당장 먹을 쌀도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키류는 퍼덕거리는 잉어 한 마리를 손에 집었다. 손에 잡혀서도 계속 꿈틀거리며 빠져나가려 애쓰는 품이 불쌍하기도 했다. 사람에게 잡혀서 절대 빠져나갈 수 없을 턴데도 결코 그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어쩐지 그 잉어의 모습이 스스로와 닮아있다는 걸 느꼈다. 아무리 퍼덕여봤자 하나기리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할 턴데도 복수를 꿈꾸고 있는 키류나 잉어나 똑같았다.
키류는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듯한 그 잉어를 다시 강에 던져 넣었다.
그래. 포기하자. 어차피 될 일도 아니다. 헛되이 목숨만 버릴 뿐이다.
키류는 진흙구덩이로 변한 강바닥을 움켜쥐었다.
나는 복수하고 싶다. 아버지가 비록 나쁜 사람인 줄도 알지만, 그리고 분명 하나기리는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한 것이겠지만…… 그걸 그대로 인정할 수 없다. 모두가 하나기리에게 복수를 체념한 것은 결코 살인귀의 행동을 받아들여서가 아닐 것이다. 그저 겁먹고 있을 뿐이다. 나에게는 나대로 해야할 일이 있다. 그렇지만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나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 하늘조차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그때였다.
키류는 움켜쥔 강바닥에서 뭔가 딱딱한 것을 느꼈다. 이것은 물고기가 아니었다. 키류는 손을 더 깊이 바닥에 넣어보았다. 길고 딱딱한 나무 조각 같은 것이 손에 잡혔다. 상당히 깊숙이 박힌 것이 오래 전에 강에 빠진 물건 같았다.
키류는 있는 힘을 다해 그것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그것은 쑥하고 빠져 나왔다.
이건?
키류는 흙투성이가 되어 나온 그 물건을 보았다. 길쭉하고도 단단한 그것은 놀랍게도 검이었다. 그것도 상당히 좋은 검인 듯 칼집이 달린 검이었다.
키류는 그 검을 강물에 담가 흙을 씻어냈다. 그러자 그 검집이 뚜렷이 드러났다. 보통 일본도와 조금 틀린 치수를 가진 검이었다. 명도라는 자기의 예상의 빗나가지 않았다. 키류는 놀라고 떨리는 마음을 추스르며 검을 자세히 살폈다.
전체적으로 보통 일본도보다 조금 길고 대신 검신이 얇았다. 검집에서 검을 빼내자 그 안에서 시퍼렇게 날이 선 검이 언제 강바닥에 있었냐는 듯 무서운 빛을 뿌렸다.
“설마…….“
검을 자세히 보던 키류는 그 검이 어디선가 전해들은 검과 일치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설마 그럴 리가…… 키류는 검을 좀더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발견하고 말았다. 검 손잡이 부분에 작게 새겨진 한자. 그것까지 본 순간 키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운명…… 입니까?”
검 손잡이에 있는 한자. 그것은 바로 미즈류(水龍)였다. 하나기리가 가지고 다닌다는 애검. 그리고 천하에 3자루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검이 지금 키류의 손에 의해 강바닥에서 발견된 것이다.

                          - 2 -
“틀림없구나.”
다음날 키류는 마을에 내려갔다. 대장간의 겐모치는 키류가 가져온 검을 몇 번이고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분명 미즈류다. 하나기리가 가지고 있는 그 검과 같은 검이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죠?”
“글쎄다. 너 이 검을 강바닥에서 주웠다고 했지?”
“예.”
“미즈류는 분명 천하에 3개 밖에 없는 진귀한 검이다. 그런데 지금 하나기리가 가지고 있는 그 검 외의 다른 두 개는 없어졌다. 네가 발견한 이것은 아무래도 그 둘 가운데 하나인 듯 싶구나.”
겐모치는 평범함 철기구 외에도 검도 취급했다. 일본도가 아닌 평범한 칼 정도는 만들기도 했다. 때문에 그는 검에 대해서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좀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세요.”
“미즈류는 보통 하나기리가 들고 다니는 애검으로 알려져 있다. 다치(큰칼)과 고다치(작은칼)을 차고 다니는 다른 무사와 달리 하나기리는 오로지 미즈류 하나만을 차고 다니지. 미즈류는 이렇게 보는 바와 같이 평균적인 일본도보다 팔 분의 일 정도 더 길고 전체적으로 약간 가늘다. 검신 전체에 있는 푸른빛과 하얀빛이 물과 용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명검 무라마사(村正)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던 도공 한 명이 무라마사를 능가하는 검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20년 동안에 걸쳐 만들었다고 한다. 그 시작으로 우선 제작된 것이 3개인데 얼마가지 않아 그 도공이 병으로 죽어 더 이상 만들어지지 못했지. 한 개는 남만 상인에게 넘어가 남만으로 팔려갔고 한 개는 전란 중에 없어져 하나기리가 쓰는 검 하나만 남았다고 하지. 네가 발견한 이 검은 전란 중 없어졌다고 들은 그 검일 거다.”
“그렇군요.”
“어떠냐? 이 검은 네가 가지고 있어봐야 소용없을 텐데 나에게 팔지 않겠냐? 값이라면 잘 쳐주마.”
“아뇨.”
키류는 겐모치의 제의를 거절했다.
“아직은 팔 생각이 없어요. 만일 팔게되면 반드시 아저씨에게 팔죠.”
겐코치의 눈에 약간의 탐욕이 보였다. 그것을 눈치챈 키류는 겐모치에게 건넸던 미즈류를 빼앗듯이 다시 돌려 받았다.
“그걸로 검이라도 배울 거냐?”
겐모치가 물었다.
검을 배운다.
그리고 보니 검만 있어서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 키류는 그걸 깨달았다. 미즈류가 있다고 해서 키류의 검술실력에 단번에 하나기리와 같아지는 것도 아니다. 천하의 명검인 미즈류라고 해도 키류가 휘두르면 그저 동네 아이들이 들고 다니는 나뭇가지나 다를바 없었다.
“아저씨 혹시 이 근처에 검술을 가르치는 사람이 있나요?”
“그야 많지. 알다시피 이세는 청풍무심류의 청풍관이 있는 곳이니까. 그곳에 입문할 수만 있다면 그것도 좋지. 아니면 저 건너마을의 낭인이라든가…….“
“청풍관은 말고요. 특별히 실력 좋은 선생은요?”
청풍관은 하나기리가 처음 검을 배운 곳이다. 그곳에서 같은 검술을 배울 생각은 없었다. 더구나 청풍관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내노라하는 영주의 자식들도 관장인 기하라의 시험을 거쳐 간신히 들어가는 곳이다. 키류가 그런 곳에 들어갈 수 있을 확률이란 천분의 일, 만분의 일도 안된다.
“실력이 좋은 선생이라고? 어느 정도면 되겠냐?”
겐모치가 반문했다.
“글쎄요. 혹시…….“
키류는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했다.
“하나기리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나요?”
“뭐?”
잠시동안 겐모치는 멍하니 키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배를 잡고 웃어댔다.
“하하! 뭐? 하나기리보다 뛰어난? 하하하! 정말 우습구나!”
“있어요? 없어요? 그것만 말해주세요!”
“당연한 말이지! 하하! 그런 사람이 있을 리가 있겠냐? 하나기리는 삼검심이야. 천하에 셋밖에 없는 검의 달인이라고. 그런데 하나기리를 능가한다니…… 누가 그럴 수 있겠냐!”
“알았어요!”
키류는 계속 웃어 제치는 겐모치를 등뒤로 돌렸다. 그리고 미즈류의 검신을 검집에 꽂았다. 부드럽고도 경쾌한 감각이 손에 전해져 왔다. 도저히 강바닥에서 상당한 세월을 묻혀있던 검이라고 상상할 수 없었다. 미즈류를 소중히 품에 안은 키류는 집에 돌아왔다.
키류의 집은 마을에서 떨어진 외딴 산기슭에 있었다. 부서진 채 버려진 집을 아버지가 고쳐서 그 앞에 작은 밭 하나를 일구어 놓은 게 고작이었다. 밭에 심어놓은 약간의 감자 덕택에 허기를 면할 수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이 집은 흉가나 다름없었다. 무너져 가는 흙벽과 썩어서 곰팡이가 핀 나무문 안에는 형체만 남은 다다미가 대충 깔려있었다.
당장 끼니를 이어갈 정도의 쌀과 밭에 심어놓은 감자가 그 집에 있는 전부였다. 돈은 단 한푼도 없었다. 아버지는 돈을 집에 두지 않고 직접 가지고 다녔다. 그런 아버지가 죽으면서 돈도 사라졌다.
“가진 것이라고는 이 미즈류 뿐인가…….“
무엇보다 소중한 보물이긴 했지만 미즈류가 생겼다고 해서 다른 것이 모두 해결되는 건 아니다. 다만 완전히 체념하지 않아도 될 하나의 목적이 생겼다.
복수. 키류의 꺼져가던 그 집념에 미즈류의 존재는 기름을 부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이것만 있다면 검에서 딸리지는 않는다. 이것이 일단 위안이 되었다. 같은 미즈류다. 하나기리의 검에 부러지거나 날이 나가버리거나 할 이유도 없다. 실력만 있다면 적어도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실력이 문제지만.
겐모치가 웃은 것도 무리는 아니다. 누구를 상대로 배운다고 해도 하나기리를 이기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검술을 가르치는 사람 스스로가 하나기리를 이기지 못하는데 키류가 아무리 열심히 배운다고 해도 이길 리가 없는 것이다.
또 다시 절망인가.
키류는 미즈류를 쳐다보았다.
“미즈류, 넌 도대체 왜 내 앞에 나타난 거지?”
검이 대답해줄 리 없는데도 키류는 그렇게 물었다. 차라리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때 강바닥에서 포기했을 것을.
어느 새 해가 지고 있었다. 키류는 미즈류를 한쪽 구석에 세워놓은 채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는 잠을 잤다.
얼마나 잤을까. 잠결에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도둑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키류는 잠이 확 달아났다. 다른 거라면 얼마든지 가져가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미즈류만은 안 된다.
방안은 어두웠다. 어두운 방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그림자가 천천히 키류를 향해 다가왔다.
틀림없이 도둑이다.
키류는 일부러 자는 척 했다. 우선 도둑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단숨에 해치워버리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실눈을 뜨고 있던 키류는 그림자가 자기에게 손을 뻗는 순간 그 손을 잡으며 그를 온 몸으로 덮쳤다. 그리고 그림자의 목을 조르려 했다.
“아얏!”
그러나 그때 가늘게 울린 소녀의 비명소리가 키류에게 들렸다.
“뭐야?”
키류는 그 그림자가 맥없이 넘어지는 것을 느끼며 방에 불을 켰다.
“마쓰(松). 너였군.”
“놀랐잖아? 키류오빠!”
방이 밝아지자 키류는 그림자의 정체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마을 포목점 딸인 마쓰였다. 올해 16살인 이 소녀는 키류를 노부시의 아들이라고 멸시하거나 두려워하는 다른 사람들과 좀 달랐다. 키류를 ‘오빠’라고 부르며 잘 따르는 것은 물론 종종 집에 놀러오기도 했다. 16살이면 벌써 시집을 갈 수 있는 나이에 속하는데도 별로 개의치 않는 듯 했다.
“무슨 일로 여기 온 거야, 마쓰!”
희고 고운 살결에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는 마쓰를 키류도 싫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소녀는 종종 어처구니없을 만큼 대담한 행동으로 키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런 밤중에 혼자서 찾아온 이런 행동도 도저히 납득하기 힘들었다.
“집에서 알면 혼날 거야. 당장 돌아가!”
키류는 그럴 때마다 그녀를 꾸짖거나 타이르는 입장에 있어야 했다. 따지고 보면 그건 키류 나름대로 그녀에게 애정이 있기 때문이었다.
“쳇! 그런 건 내 마음이야 뭐!”
마쓰가 혀를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 키류의 마음이야 어쨌든 그녀에게 키류의 그런 행동은 잔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못 말리겠군, 정말.”
키류는 언제나 마쓰에게는 한 수 접어줘야 했다. 말싸움을 해서는 한번도 그녀를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여기 온 건지 말 안 할 거야?”
그래도 이번만은 잠자코 넘어갈 수는 없었다. 자칫하면 도둑으로 알고 그녀의 목을 조를 뻔했다. 그러니까 확실히 해둬야 했다.
“뭐야?”
마쓰는 섭섭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일부러 위로해주려 왔는데.”
“위로라니?”
“키류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어. 그래서 뭔가 말해주려고…….“
솔직하다면 솔직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마쓰에게서 그 말을 듣는 순간 키류가 느낀 것은 위로감이 아니라 오히려 슬픔이었다. 처음으로 자기를 동정해 준 사람이 자기보다 두 살이나 어린 마쓰라니. 그만큼 키류가 외톨이라는 의미였다.
“아까 그래서 일부러 얼굴을 보려고 했어. 울고 있지 않은가 해서…… 그런데 갑자기 일어나서 놀랐어.”
그랬었구나. 키류는 어째서 마쓰가 일부러 어둠 속에서 다가왔는지 알았다. 그리고 울지 않은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마쓰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어? 이건 뭐야?”
불빛으로 인해 밝아진 방안에서 구석에 세워진 미즈류를 보자 마쓰는 즉각 그리로 다가갔다.
“검이잖아? 그것도 아주 좋은 검처럼 보이는데…….“
“만지지마!”
키류는 즉각 미즈류를 집어들고는 품속에 넣었다.
“이건 내 검이야.”
“어라, 키류오빠는 원래 검 같은 거 없었잖아? 갑자기 어디서 생긴 거야.”
“사, 샀어!”
“거짓말! 그럴 돈이 없다는 것쯤 내가 잘 아는데? 거기다 대장간 겐모치 아저씨도 아무 말 없었다고. 만일 오빠가 검을 샀다면 내가 먼저 알았을걸?”
그리고 보니 키류는 겐모치 아저씨가 포목점 주인, 그러니까 마쓰의 아버지와 아주 친한 사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검을 산다면 분명 그렇게 소문이 날 것이다. 겐모치는 검을 파는 무구(武具) 가게 주인과도 잘 알고 지냈다.
“어쨌든 이건 내 거야. 그러니까 함부로 만지면 안 돼.”
그래도 다행히 미즈류에 대한 것만은 아직 말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키류는 대충 둘러대는 말로 적합할 이유를 찾아야 했다.
“그거 주운 거야?”
그런데 이런 키류의 수고를 먼저 마쓰가 덜어주었다. 주운 거라…… 확실히 그렇다면 거짓말은 아니다. 분명 이것은 강바닥에서 주웠으니까.
“응. 주운 거야.”
“그런데 왜 거짓말을 했어?”
“안 믿어줄 것 같아서…….“
“내가 왜 안 믿어!”
마쓰가 갑자기 큰 소리를 냈다.
“내가 얼마나 키류오빠를 믿는데! 그걸 모르는 거야?”
“아, 아니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그러니까…….“
키류는 그 뒤에 마쓰가 무슨 행동을 할 지 알자 황급히 사과하며 달랬다.
마쓰는 거의 울지 않는 소녀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키류 앞에서만은 뭐가 그리도 분한지 분에 못이기면 눈물을 흘렸다. 말싸움에서도 뒤지는 데다 마쓰의 눈물까지 보게되면 강한 기질을 가진 키류도 쩔쩔 맬 수  밖에 없었다. 키류는 여자를 울리는 건 딱 질색이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아버지의 행동 때문에 자주 우는 것을 보면서 결심한 것인데 마쓰는 그걸 가장 잘 이용하고 있었다.
“흠, 그럼 그 검 보여줘.”
울려는 행동을 취하던 마쓰는 어느 새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너, 처음부터…….“
“어서 보여줘. 안 그러면 날 믿지 않는 걸로 알 거야!”
아예 협박이었다. 키류는 한숨을 쉬며 미즈류를 넘겨주었다. 뭐 본다고 해서 마쓰가 그 검을 알아볼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마쓰는 검이나 무사 이야기에 관심이 없었다. 마쓰가 관심 있는 것은 성의 공주님이 어떤 색깔의 기모노를 주로 입는가, 올해 마을 축제 때는 어떤 옷이 유행할 것인가 이런 것이었다. 아무래도 포목점 딸이라는 영향인 것 같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다행이었다.
“어디, 어디…….“
미즈류를 집어든 마쓰의 얼굴이 제법 진지하게 변하며 검을 이리저리 살폈다. 진기한 장난감을 접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이 가진 귀여움에 키류는 잠시 넋을 잃고 마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말해 마쓰는 활짝 피기 전의 꽃봉오리나 다름없었다. 아직은 귀여운 소녀에 불과했다. 그러나 앞으로 몇 년만 지나면 마을 최고의 미녀가 될 것이 분명했다. 벌써 거리에 나갈 때마다 마을 젊은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으며 혼담도 수십 건이 들어왔다고 했다. 그런데 이런 말은 주로 마쓰가 직접 키류에게 한 말이었다. 그녀는 그 말을 하면서 늘 키류의 반응을 살폈다. 그리고는 조금이라도 키류가 반응을 보이면 재미있다는 듯 손뼉을 치며 웃었다.
“뭐야?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한참 검을 쳐다보던 마쓰가 키류의 시선을 보더니 슬쩍 웃었다. 오늘도 역시 그녀는 은근히 키류의 행동을 살피고 있는 것이다.
“아무 것도 아냐.”
미즈류를 다시 돌려 받으며 키류는 이루어지지 못할 꿈을 생각했다. 만일 혹시라도 자기가 눈앞에 있는 이 귀여운 소녀와 결혼할 수 있다면, 그래서 둘이 행복한 살림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상상했다. 키류는 슬며시 마쓰의 뺨에 손을 뻗었다. 그녀는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다.
“자꾸 왜 그래?”
마쓰는 슬며시 키류가 내민 손을 피했다. 키류의 눈빛을 즐기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지는 않겠다는 태도였다.
키류는 손을 내렸다.
그것이 가능할 리가 없다. 마쓰에게는 지금 무사급을 비롯해 상당한 상인의 아들들이 혼담을 넣어놓고 있었다. 키류와 소꿉친구처럼 이렇게 지내는 것을 그냥 넘어가 주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분수에 넘게 그 이상을 넘본다면 어떻게 될 지 결과는 뻔했다.
“마쓰.”
“왜?”
“어떻게 생각해? 내가 만일 검술을 익혀 무사가 된다면…….“
“무사?”
“그래. 무사가 된다면 말야. 뭔가 달라질 것 같아?”
달라진다. 이것이 키류가 말하고 싶은 말이었다. 노부시의 자식에 불과한 키류의 신분으로 치면 평민에 불과했다. 아버지는 무사라고 주장했지만 마을사람들이 보기에 섬기는 주인이 없는 노부시란 존재는 강도나 도둑과 같았다. 오히려 농민보다 못한 처지였다. 그런데 정식으로 검술을 익혀 주인을 섬기게 된다면 무사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분명 달라지는 게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나와 너 사이의 관계라든가.”
마쓰가 한참동안 대답하지 않자 키류는 슬그머니 말을 꺼내보았다. 그로서는 마쓰가 어느 정도까지 자기마음을 눈치채고 있는지 그것조차 알지 못했다.
마쓰는 상인의 딸이다. 상인은 평민신분이지만 돈이 있기 때문에 무사들과 비교적 긴밀했다. 돈을 많이 버는 거상의 경우는 영주나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한다. 때문에 상인은 신분을 높이기 위해 대부분 하급무사 이상 무사와의 혼인을 원하는 게 보통이었다. 키류가 마쓰의 아버지에게 가서 마쓰를 주십시오 하고 아무리 애원해봐야 소용없을 건 당연했다.
“후훗! 오빠도 참!”
마쓰가 콧소리를 넣어가며 웃었다.
“변할 게 어디 있어? 언제 어떻게 되건 키류오빠는 키류오빠고 나 마쓰는 마쓰야. 안 그래?”
“하긴 그렇겠구나.”
돌아온 대답에 키류는 크게 실망했다. 어떻게 된다해도 마쓰는 키류를오빠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겠다는 말인 듯 했다.
“하지만 말야. 만일 무사가 되면 오빠에게 한가지만 부탁할 게 있어.”
“그게 뭔데?”
“비밀!”
마쓰는 입술을 오므리더니 그 앞에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절대 말하지 않겠다는 시늉이었다.
마쓰가 돌아가고 난 후 키류는 불을 끈 방에서 다시 생각에 잠겼다.
복수를 하겠다고 생각하면 사실 마쓰에 대한 감정은 접어야 한다. 하나기리와 대결한다면 목숨을 잃거나 혹은 팔 다리 중 어디 하나가 잘릴 것을 각오해야만 한다. 즉 죽거나 병신이 되는 것이다. 멀쩡히 살아서 복수를 마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공상일 뿐이다.
그렇지만 단순히 복수를 포기한다고 해서 마쓰와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마쓰와 평생 소꿉친구 정도로 지내는 것을 위해 하늘이 준 운명을 포기한다는 건 오히려 우스운 일이다. 지금 손에 느껴지는 미즈류의 차가운 감촉조차도 키류를 비웃을 것이다.
‘그래. 어디에선가 검술을 배워서 그걸 바탕으로 실력을 키우고 최종적으로는 하나기리를 베는 거다. 하나기리를 벤다면 모두들 내 실력을 인정해 주겠지. 그렇게 되면 무사는 어떻게든 될 수 있어.’
하지만 누구에게 어떻게 배울 것인가. 그게 문제였다. 키류는 미즈류를 품에 안은 채 이리저리 몸을 뒤척였다. 어느 새 문밖이 약간 밝아지는 것이 새벽이 되고 있었다.

                         - 3 -
며칠이 지난 후 마쓰가 재미있는 말을 전해주었다.
마을에 여태까지 본 적이 없는 이상한 소녀가 와서 노래를 부르며 꽃을 팔고 있다는 것이다. 단지 꽃이라면 일부러 돈을 주고 살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그 소녀가 부르는 노래가 하도 곱고 아름다워서 마을 사람들이 다투어 꽃을 사고 있다고 했다.
미즈류를 얻은 후 집안에 틀어박혀 생각에 잠겨있던 키류도 이 말을 듣자 호기심이 생겼다. 과연 어떤 소녀일까?
키류가 마을에 들어갔을 때는 막 해가 중천을 넘어선 오후였다. 봄의 햇살은 제법 따뜻했고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도 가벼운 차림으로 저마다 봄을 즐기고 있었다.
키류는 눈을 좌우로 돌려 마쓰에게서 들은 그 소녀의 모습을 찾았다. 소녀는 주로 마을 오른쪽 중앙 즈음에 있는 우물가에서 꽃을 판다고 했다.
우물가에는 아직 사람이 없었다. 키류는 약간 실망했다. 거의 매일같이 나와서 꽃을 판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안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이렇게 실망하고 고개를 돌리는 키류의 눈에 사람들이 약간 웅성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시 쳐다본 우물가에는 곱게 옷을 차려입은 소녀 한 명이 나와있었다.
바로 저 소녀인가? 키류는 소녀를 자세히 살폈다.
나이로는 거의 키류와 동갑일 것 같았다. 붉은 색 기모노를 입고는 손에는 샤미센(일본 전통 악기)를 든 것이 매우 예쁘게 보였다. 얼굴은 약간 마른 것이 갸날프게 보였지만 전체적으로는 상당한 미인형이었다. 똑같이 소녀라고 불려도 마쓰 쪽이 어린애에 가깝다면 이 소녀는 여인에 가까웠다.
- 투퉁.
가볍게 샤미센을 뜯는 소리가 났다. 현악기의 일종인 샤미센은 가볍게 퉁겨주는 것만으로 훌륭한 소리를 낸다. 소녀는 그 악기의 특징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샤미센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대여섯 명이던 우물가의 사람은 나중에는 거의 50명은 될 듯한 인파가 되었다. 키류는 그 사람들을 헤치고 맨 앞으로 나갔다.
“오늘도 이렇게 모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다 모여든 것을 확인한 소녀는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인사말을 했다.
“이제부터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노래를 듣고 난 후 혹시 마음에 드시면 이 꽃을 조금만 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대나무 바구니에 든 꽃을 내려놓은 소녀는 드디어 샤미센을 연주하며 노래를 시작했다.

꽃잎마저 시든 봄날의 빗속에서
미소지으며 내 님은 떠나갔네.
기필코 돌아오겠다 약속을 했지만
올해 돌아온 건 무정한 제비뿐.

옛부터 전해오는 노래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즉석에서 지어 부르는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소녀의 목소리는 맑고도 투명했다. 슬픔을 노래하는 가사 속에서 키류는 가슴을 찌르는 느낌을 받았다.
갑자기 며칠 전이 생각났다. 벚꽃이 봄비에 젖은 날 들었던 아버지의 죽음. 그때 키류는 억지로 슬픔을 눌렀다. 그때 참았던 눈물이 자칫하면 지금 나올 것만 같았다.
“다음에는 즐거운 노래를 하겠습니다.”
노래를 들은 사람들이 저마다 그 곡에 빨려던 것을 보며 소녀는 다시 곡을 바꿨다.

저기 걸어가는 저 스님.
어제는 곡차(穀茶) 오늘은 향육(香肉)을 즐기니
내일은 무엇을 찾겠느냐 물어볼 필요도 없겠구나.
그 누가 부처를 섬기며 보살(菩薩)을 멀리 할까.

신랄한 풍자시였다. 파계를 한 중이 어제 술을 마시고 오늘 고기를 먹으니 내일은 분명 여자를 찾겠구나 하는 뜻이었다. 실제로 이때 일본의 중들은 대부분 그런 계율들을 지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세태를 비꼬는 노래임에도 빠른 운율과 경쾌한 가락이 어우러지자 사람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 뒤에도 몇 곡인가 계속되었다. 키류는 노래가 새로 나올 때마다 소녀의 연주실력과 목소리. 그리고 노래의 영감에 감탄했다.
노래가 전부 끝나자 박수와 함께 사람들이 다투어 꽃을 샀다. 가진 돈이 없는 키류는 멍하니 있었다. 그런 키류를 본 소녀 싱긋 웃었다.
“혹시 꽃 필요한가요?”
“아, 전 돈이 없어요.”
“괜찮아요. 필요하다면 몇 송이 가져가세요.”
마음씨도 착한 듯 했다. 필요 없다고 사양하려다가 키류는 문득 마쓰를 생각했다. 그녀에게 한번도 꽃을 주어본 적이 없었다. 만일 준다면 상당히 기뻐할 것 같았다.
“그럼 이걸로…….“
키류는 꽃을 몇 송이 골라잡았다. 노래에 감탄한 사람들은 돈만을 주고 막상 꽃은 가져가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바구니에 꽃은 아직 상당히 많이 남아있었다.
“이봐! 너 도대체 뭐야?”
사람들이 모두 흩어졌을 때 다가온 두 명의 남자가 갑자기 소리쳤다.
“예? 무슨 말이시죠?”
“누구 허락을 받고 여기서 장사를 하느냐 말이다! 여긴 우리 허락 없이 함부로 장사할 수 없어!”
척 보기에도 시비를 걸러오는 모습이었다. 키류는 한 손에 굵직한 몽둥이를 들고 있는 이 두 명의 위세에 질려버렸다.
“여기서는 아무나 장사할 수 있다고 하던데요.”
소녀는 그러나 오히려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소나 논리가 통할 상대가 아니었음에도.
“네가 잘못 들은 거야. 여기는 우리 허락을 받지 않으면 안 돼.”
“그럼 허락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하죠.”
소녀가 물었다.
“간단하지.”
그제야 두 명은 얼굴에 징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네가 번 돈의 9할을 내는 거야. 어때?”
“그렇군요.”
소녀는 웃음을 아직 지우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당신들은 그렇게 해서 불쌍한 사람들을 뜯어먹고 살았군요.”
비아냥거림이 담겨있는 말이었다. 그러자 남자들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그래서? 못 내겠다 이 말이냐?”
“아무래도 이 아가씨는 맛을 한번 봐야 알겠군!”
두 남자는 소녀에게 다가가며 그녀의 멱살을 잡으려 했다.
“아, 위험해!”
보고있던 키류는 그만 그 소녀에게 뛰어가려 했다. 키류가 달려든다 해서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다급한 김에 소리를 지르며 키류는 손에 들고 있던 꽃을 냅다 던졌다.
“받아라! 이 악당들아!”
“뭐야?”
요란한 키류의 목소리에 놀란 남자는 잠깐 멈춰서며 키류가 던진 꽃을 막았다.
“지금이야!”
키류는 재빨리 소녀의 손을 붙잡고 뛰었다. 꽃을 준 보답으로라도 이 소녀를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엉겁결에 붙잡은 소녀의 손목이 매우 부드럽고 따뜻했지만 그걸 신경 쓰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아!”
잠깐 당황하던 소녀는 곧 키류를 따라 뛰었다.
“이 녀석들! 거기 안 서!”
몽둥이를 부여잡은 남자들은 즉시 추격해왔다. 키류는 마을 밖으로 뛰었다. 마을 밖이라면 숨을 곳도 여기저기 있을 것이다.
“앗!”
그런데 얼마 뛰지 않아 서두른 탓인지 키류의 발이 돌부리에 걸렸다. 키류는 그만 앞으로 넘어졌다. 품속에 고이 넣어두었던 미즈류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괜찮아요? 아!”
키류를 일으키려던 소녀가 미즈류를 보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떠지며 손이 입으로 갔다.
“이건! 미즈류!”
소녀의 오른손이 땅에 떨어진 미즈류를 집었다. 그 서슬에 소녀의 소매 안에 있던 돈이 떨어져 사방에 흩어졌다.
“돈이 떨어졌어요!”
키류는 그 돈을 주우려했다. 그러나 소녀는 그걸 막으며 물었다.
“어떻게 당신이 이 칼을 가지고 있는 거죠? 말해봐요!”
“이럴 때가 아니에요! 어서 돈을 주워 가지고 도망가야죠! 그렇지 않으면…….“
“나한테는 지금 이게 가장 중요해요! 이 검을 어떻게 손에 넣은 거죠?”
“주운 거예요. 강바닥에서. 하지만 그게 왜 중요하다는 거예요! 지금 오고 있는 자들에게 걸리면 죽어요! 죽는다고요!”
키류는 허겁지겁 흩어진 동전을 주웠다. 흙투성이가 된 손에 대강 동전이 모이자 그는 일어서며 다시 소녀의 손을 잡고 뛰려했다.
“괜찮아요.”
그러나 소녀는 키류의 손을 뿌리쳤다. 그 동안 이미 추적하던 남자들은 둘이 있는 곳을 따라잡았다.
“아! 이젠 끝이군요!”
키류는 절망적인 심정이 되어 머리를 감싸쥐었다. 소녀는 고사하고 자기조차 구하지 못할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 검 잠깐 빌리죠. 괜찮겠어요?”
소녀가 다시 물었을 때 키류는 그녀가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물론이죠. 마음대로 하세요. 여기서 맞아 죽고 나면 아무 소용도 없을 테니까요.”
“당신 의외로 용기가 없군요.”
소녀는 검을 쓱 뽑으며 곧게 세웠다.
“뭐냐? 검?”
“하하! 어린 여자애가 검을 잡는다고 누가 겁낼 줄 아냐? 너희들은 오늘 여기서 죽었다!”
두 남자는 그런 소녀를 비웃었다.
“꼬마는 여기서 죽여버리고 이 여자는 한번씩 맛보고 죽이지. 그냥 죽이기에는 아깝군.”
먼저 앞으로 나선 남자가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게걸스럽게 말했다.
“잘 봐둬요.”
소녀는 이런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고 키류에게 차분히 일렀다.
“용기를 가지면 어떤 상황이든 헤쳐나갈 수 있어요.”
“까불지 마!”
그러나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앞에 선 남자의 몽둥이가 날아왔다. 바람소리를 내며 날아든 몽둥이는 소녀의 옆구리를 노렸다.
“에잇!”
한 발 뒤로 몸을 퉁기며 물러선 소녀는 뒤로 물러선 발을 다시 걷어차며 몽둥이가 회전한 뒤의 공간에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미즈류의 검신을 이용해 남자의 얼굴을 강하게 타격했다.
“으악!”
코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며 남자는 얼굴을 감싸쥐었다.
“이년이!”
뒤에 있던 남자는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챈 듯 직접 소녀의 정수리를 노리고 몽둥이를 내리쳤다.
소녀의 왼발이 강하게 땅을 차며 그 발을 축으로 몸이 한바퀴 회전했다. 헛친 몽둥이로 인해 약간 비틀거리던 남자의 몸이 중심을 잡으려는 순간 회전력과 함께 올라간 소녀의 검이 남자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검날을 이용하지 않고 넓은 면과 칼등만을 사용해서 검을 마치 둔기처럼 이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커억!”
뒤통수를 맞은 남자는 앞으로 고꾸라지며 신음을 내뱉었다.
“두, 두고보자! 기억해두겠다!”
단 한번의 대결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소녀의 검술을 본 두 명은 더 이상 덤벼들지 못하고 그 자리를 피해 도망갔다.
“대, 대단하군요. 혹시 무사?”
소녀가 다시 검집에 집어넣는 미즈류를 보며 키류는 그것이 그 소녀와 더 잘 어울리지 않는가 생각했다.
“무사 같은 신분은 아니에요.”
소녀는 약간 수줍게 웃었다.
“그럼 어딘가의 공주님이세요? 혹시?”
“농담도 심하시네요.”
소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조금 전 미즈류를 마치 자기 것인 양 휘두르던 때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저는 조선인(朝鮮人)이에요.”
“조선인이요?”
키류가 조선인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아주 적었다. 바다 건너 북쪽에 있는 나라고 호랑이와 인삼이 많이 난다는 정도.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몰랐다.
“이름은 신정하(申貞河)라고 해요. 즉석에서 시를 지어 노래를 부르는 일을 하고 있지요. 어머? 뭐하고 있는 거예요?”
키류가 아직도 떨어진 돈을 마저 줍는 것을 보고 소녀, 아니 정하는 그것을 말렸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제가 주울께요.”
“아니에요.”
키류는 소녀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동전을 전부 주웠다. 그리고 그걸 정하에게 내밀었다.
“여기 돈 받으세요.”
“고마워요.”
정하는 하얀 손을 들어 키류가 건넨 돈을 받았다.
“내 이름은 키류. 노부시의 아들이죠.”
키류는 엉덩이를 탁탁 털고 일어나며 자기소개를 했다.
“정말 고마워요. 아까도 일부러 도망가게 해 주고 지금도 돈을 주워주시고.”
“아무 것도 아니에요. 당신실력을 미리 알았다면 절대 그렇게 무리하지 않았겠죠. 더구나 당신은 아까 저에게 공짜로 꽃을 줬잖아요.”
“그래서 그 꽃 한 송이에 목숨을 건 건가요?”
“어떻게 보니 그렇게 됐어요. 꽃이 이쁘기는 했지만 제 목숨 값만큼이야 못하죠.”
“후훗…… 재미있네요. 당신, 아니 키류.”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정하.”
“상으로 뭔가 원하는 걸 하나만 들어줄께요. 말해봐요.”
정하는 입가에 맺힌 미소를 더욱 짙게 하며 키류에게 다가왔다.
키류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가까이에서 본 정하의 미모와 몸에서 느껴지는 묘한 향기가 키류를 온통 들뜨게 만들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건…….“
키류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하나기리를 베는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에게 그걸 위한 검술을 배우고 싶어요!”
키류가 소원을 말하고 난 뒤 한참동안 정하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생각에 잠긴 정하에게 키류가 다시 물었다.
“불가능한가요? 당신으로는?”
“쉬운 소원은 아니군요.”
“그러니까 소원이죠. 당신이라면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정하가 아까 보여준 놀라운 움직임을 키류는 머릿속에 넣어두고 있었다.
“당신은 검술을 익히고 있죠? 그것도 아주 강한 검술을.”
“약간 익히고 있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는…….“
정하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게 능숙하진 못해요.”
“결국 하나기리를 벨 정도는 안 된다는 말이군요.”
키류는 크게 실망했다.
“힘들겠지요.”
정하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아까 당신이 한 말은 거짓말인가요? 용기가 있으면 어떤 상황이든 헤쳐나갈 수 있다고 말했잖아요? 그건 겉만 번지르르한 말이군요.”
“그렇진 않아요.”
정하는 강하게 부정하며 키류를 쳐다보았다. 이어서 그녀의 눈은 아직 그녀의 손에 남아있는 미즈류로 향했다. 그녀는 미즈류를 키류에게 돌려주며 작게 속삭였다.
“어쩌면…… 키류 당신이라면 가능할 지도 모르겠군요.”
“예? 방금 뭐라고 하셨죠?”
잘 듣지 못한 키류가 귀를 가까이 하며 물었지만 정하는 다시 대답해 주지는 않았다.
“키류, 당신은 하나기리의 실력을 어느 정도 알고 있죠?”
“실력이요?”
“적을 이기기 위해서는 우선 적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지 않으면 안되요. 당신이 반드시 베어야겠다고 하는 하나기리에 대해 안다는 건 중요하죠.”
“대충 다른 사람들이 알고있는 정도는 다 알고 있어요. 삼검신이고 청풍무심류와 풍신일도류를 쓰며 애검은…….“
“그런 것 말고요!”
정하는 키류의 말을 중간에서 잘랐다.
“직접 그의 동작이나 싸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나요?”
“아뇨. 그런 적은 없어요.”
키류는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반드시 그를 베고 말 거예요! 그게 제 소원이에요!”
키류의 눈에 강한 복수심이 나타났다. 키류는 미즈류를 힘을 주어 잡았다. 절망감에 포기하려고 할 때마다 하늘은 그를 위해 반드시 방법을 마련해 주었다. 어쩌면 이 조선인 소녀 정하도 이런 그를 위해 나타난 것일지 모른다.
“어쨌든 제 소원은 그것 하나뿐이에요. 나에게 검을 가르쳐 줘요!”
키류는 아예 애원하는 심정으로 부탁했다. 사실 실력도 문제였지만 돈이라고는 한푼도 없는 키류가 정상적으로 검을 배울 수 있는 길은 없었다. 모처럼 나타난 기회를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다.
“검술만 가르쳐 준다면 뭐든지 시키는 대로 할께요!”
그 말을 들은 정하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동전을 다시 소매 속에 넣더니 한참동안 먼 하늘을 보았다. 이제 저녁이 되어가고 있었다. 붉은 저녁놀이 보이는 산너머에는 까마귀 몇 마리가 날고 있었다.
“키류의 집이 어디죠?”
“저기 산기슭이에요. 왜 그러죠?”
“당분간 신세를 좀 지게 되겠군요.”
“검을 가르쳐준다는 말인가요?”
“어쩔 수 없지요. 어쩌면 당신에게 꽃을 주었을 때부터 생겨난 운명일지도 모르죠. 게다가 이 미즈류가 그 운명을 더욱 강하게 이끌고 있으니까요.”
정하의 손끝이 미즈류를 가리켰다.
“이 미즈류와 하나기리에게는 저 역시 약간의 인연이 있는 몸이니까요.”
그러나 그 인연이 무엇인지 정하는 말하지 않았다.

                          - 4 -
그로부터 3달 동안 키류는 정하에게 검의 기본을 배웠다. 검을 쥐는 방법부터 검술의 기본이 되는 보법, 몸의 균형을 유지하는 훈련과 기본적인 검술 자세 등을 몸에 완전히 익을 때까지 익혔다.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인 검술을 가르쳐 주겠어요.”
3달이 지난 어느 날, 정하는 키류의 집 뜰에서 나뭇가지를 깎아 만든 목검을 들고 키류와 마주섰다. 여름이 된 산기슭은 뜨거운 햇빛과 매미소리로 가득 찼다.
“어떤 검술이죠? 하나기리를 벨 수 있는 검술이 분명하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키류가 물었다.
“노력여하에 따라서는 가능할 지도 모르지요.”
서로 동갑이었지만 검술선생이 된 만큼 키류는 정하에게 꼬박꼬박 말을 올려야했다. 반면 정하는 키류에게 하대를 하지 않았다.
“먼저 하나기리가 쓰는 검술에 대한 분석부터.”
정하는 목검을 들고 자세를 취하며 하나하나 설명을 시작했다.
“하나기리가 주로 쓰는 청풍무심류 검법은 정(靜)적인 자세를 그 근본으로 하는 일도류 검법. 그러니까 가만히 있다가 순간적으로 힘과 속도를 끌어올려 상대를 공격하는 걸 중시하지요. 청풍무심류에선 이것을 후공선제압의 원리라고 해요.”
정하는 청풍무심류의 기본자세를 취하며 키류에게 명했다.
“자, 한번 날 공격해봐요.”
“알겠어요. 하아!”
우렁찬 기합과 함께 키류는 정하의 정면으로 검을 휘두르며 들어갔다. 기본은 익혔지만 아직 제대로 된 검술의 형(型)이 없는 만큼 무작정 하는 공격이었다.
“얍!”
정하는 공격해 오는 키류를 맞아 오른발을 앞으로 내딛으며 몸을 약간 숙였다. 그리고는 왼발을 살짝 뒤로 빼며 옆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달려오던 키류의 몸은 마치 미쳐 날뛰는 황소의 뿔처럼 정하의 옆을 지나갔다. 그 순간 정하의 목검이 키류의 옆구리를 쳤다.
“허걱!”
비록 세게 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목검에 의한 공격이었다. 키류는 신음소리를 내며 옆으로 쓰러져 굴렀다.
“괜찮아요?”
정하가 다가가 키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키류는 그 손을 잡지 않고 일어났다.
“과연 강하군요. 청풍무심류는.”
“별로 수련한 적도 없는 내가 한 거예요. 하나기리는 이것보다 몇 배는 빠르고 강하다고 봐야해요.”
정하는 키류의 말을 수정해주었다.
“어쨌든 이 원리에 충실한 것이 청풍무심류인 만큼 하나기리의 공격도 기본은 이런 형태로 이루어져요. 기억해둬요.”
“알았어요.”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서 청풍무심류의 기본동작.”
정하는 목검을 들고 하나씩 자세를 잡아 보인 다음 키류에게 그 동작들을 따라하게 했다. 그에 따라 키류는 이제까지 전혀 몰랐던 청풍무심류 검술을 파악할 수 있었다.
청풍무심류는 발도술을 상당히 중시한다. 아직 검집에 있는 상태의 검을 단숨에 뽑아 상대의 급소를 노리는 발도술은 칼을 뽑아든 상태에서 휘두르는 것보다 더 빠른 공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청풍무심류는 발도술만 해도 다섯 가지 이상을 가지고 있다.
기본자세에는 교육형과 실전형이 있고 각각 공격을 위한 자세와 방어를 위한 자세로 나누어진다. 교육형의 모든 자세들을 배우게 되면 다음으로 실전형 자세를 배우게 된다.
키류는 실전형 동작을 모두 연결하며 하나의 완성된 동작으로 만들려 애썼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수평으로 베는 횡유세(橫遊勢)에서 상대의 오른쪽 허벅지에서 왼쪽 어깨까지 아래에서 위로 그어 올리는 비익조(飛翼鳥)의 기술. 그리고 상대의 공격을 받아내며 이것을 멈춤 없이 유연한 찌르기 공격으로 변화시키는 야랑자(野狼刺)를 연결했다. 이어서 풀을 베듯 낮게 몸을 숙이며 상대의 발목을 노려 검을 치는 초절세(草切勢)와 위에서 아래로 빠르게 내리베는 낙성파(落星破)를 행하니 어느 정도 자세의 연결을 이룰 수 있었다. 그것은 수련기간이 짧은 키류에게 있어서 쉴 새없이 모든 동작을 반복 연습하기에 딱 좋은 방법이었다.
“후공선제압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면 공격과 방어는 모두 한 동작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칙이 나와요. 이걸 청풍무심류에서는 공수일체라 부르며 관련된 초식들을 가르치죠.”
청풍무심류의 기본을 모두 습득한 키류에게 정하는 점점 심화된 내용을 가르쳤다. 어떤 책이나 기록도 없었지만 정하는 모든 것을 암기라도 하고 있는 듯 거침없이 풀어냈다.
키류는 때때로 정하의 그 놀랄만한 암기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했다. 그렇지만 정하는 별로 자기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다. 때문에 키류는 정하라는 이름과 조선인이라는 것 이상은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다행인 것은 그간 뻔질나게 키류의 집을 드나들던 마쓰가 갑자기 오지 않게 된 일이었다. 정하가 마을에 왔다는 사실을 알려준 후로 마쓰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 내려가는 마을에서도 마쓰에 대한 소식은 별로 들을 수 없었다. 중요한 혼담 하나가 들어와서 한창 열심히 신부수업 중이란 이야기도 들렸다. 신경 쓰이는 말이긴 그런 정도라면 차라리 좋았다. 만일 마쓰가 키류의 집에 와서 정하를 봤더라면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을 것이다.
반년 정도가 훌쩍 지나갔다. 계절이 가을로 바뀌는 9월이 되자 키류도 슬슬 정하가 가르쳐준 모든 동작을 몸에 익히게 됐다. 물론 그것은 일단 익숙해진 것에 지나지 않았다. 숙련이라는 과정을 거쳐야만 제대로 검술을 한다고 할 수 있었다.
“이제 그만 떠나야겠어요.”
가을 낙엽이 떨어지고 있는 나무 밑에서 정하는 이별을 말했다. 예상했던 일이긴 했다. 정하가 언제까지나 키류와 함께 여기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알긴 했지만 키류는 무척이나 아쉬운 감정을 느꼈다. 무엇보다 아직 정하와 제대로 된 대화를 주고받은 일이 없었다. 정하는 검술을 가르치거나 식사를 하는 때 외에는 늘 한쪽에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투명한 눈망울에는 깊은 슬픔이 맺혀있었다.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키류는 그러지 못했다. 정하가 키류에게 한 약속은 오로지 검술을 가르쳐준다는 하나뿐이다. 아직은 타인에 불과한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함이라는 벽이 놓여있었다. 그 벽은 반년동안 거의 깨지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아마 정하가 검술선생이라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키류에게 하대를 하지 않은 이유도 그럴 것이었다.
“한 가지 물어봐도 돼요?”
하지만 막상 떠난다는 정하 앞에서 키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로 아무 것도 모른 채 그녀를 떠나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하다못해 무엇 때문에 그녀가 미즈류를 보고 놀랐는지 하나기리와 어떤 사연이 있는지 그것만이라도 알고 싶었다.
“한가지 정도라면.”
정하는 의외로 선선히 승낙했다. 아마 그녀도 떠난다는 말이 가져오는 감정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는 듯 했다. 저녁놀이 그녀의 얼굴 위에서 붉게 물들고 있었다.
“하나기리와는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거죠?”
“그게 궁금했군요.”
정하는 마치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차분히 대답했다.
“혹시 그와…….“
“그와 뭐죠?”
“내연의 관계라든가…… 그런 건가요?”
키류는 말을 조금 더듬었다. 될 수 있는 대로 태연히 물어보려 했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글쎄요…….“
정하는 시인과 부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샤미센을 들었다. 그리고는 현을 한번 퉁겼다. 키류와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이 좋은 음이 나왔다.
작고 가늘게 울리는 그 음에 맞춰 정하는 노래를 불렀다.

오랜 도읍에 도착한 나그네를 맞은 것은
흩어진 벚꽃과 촉촉한 봄비더라.
비가 걷힌 후의 하늘을 벗삼아
두 사람이 나란히 한 길을 가더라.

잔잔하지만 기쁨이 넘쳐있는 노래였다. 가사와 곡조에 담긴 감정을 느낀 키류는 정하가 분명 하나기리를 좋아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냉혹한 살인귀이긴 했지만 분명 하나기리는 많은 여자들에게 있어 너무도 매력적인 남자였다. 신기에 가까운 검술과 화려한 미모, 게다가 차가운 성격에서 오는 신비감은 여자들의 감추어진 동경과 욕망을 자극하는 면이 있었다. 때문에 하나기리를 따라다니던 여자 이야기라면 그것만으로도 능히 하룻밤은 새고 남을 정도의 이야깃거리가 나온다 했다. 정하가 하나기리와 어떤 일이 있었고 그로 인해 연정(戀情)을 품게 되었다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 팅!
그러나 그 노래가 끝난 후 샤미센 줄이 흉하게 튀는 소리를 냈다. 동시에 정하의 눈에는 강한 분노가 서렸다.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그가 미쳐 날뛰던 그 날 밤의 모습을…… 나는 그를 잡을 수 없었고 결국 그는 피에 굶주린 살인자가 되었죠. 나는 그를…….“
정하는 목이 메어오는지 잠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저주하고 있어요!”
마침내 마지막 말을 쏟아낸 정하는 고개를 위로 치켜들었다. 눈을 감은 그녀의 얼굴 위에서 두 줄기의 눈물이 아래로 떨어졌다. 붉은 노을이 비쳐 마치 핏빛과도 같은 색깔의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더 묻고 싶었다. 그러나 정하의 얼굴에서 흐르는 그 핏빛 눈물을 보는 순간 키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정하는 키류와 함께 뜰에 섰다, 다른 때와 같은 수련모습이었지만 이날은 약간 틀렸다. 정하는 늘 쓰던 목검 대신에 미즈류를 들고 있었다.
“키류. 이제까지 배운 것 잘 기억하고 있겠죠?”
“물론이죠.”
“그 동안 참 잘 따라줬어요. 아마 내가 가르쳐 준 그것들을 반복해서 연습한다면 웬만한 무사수준 정도는 될 수 있을 거예요.”
“고마워요, 정하.”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절대 하나기리를 이길 수 없어요. 알고 있겠지만.”
정하의 다음 말이 유난히 차갑게 들렸다.
“이대로 당신이 하나기리에게 도전한다 해도 개죽음을 당할 뿐이에요. 그러니까…….“
정하는 미즈류를 천천히 검집 채로 들었다.
“이제부터 내가 하는 걸 잘 봐둬요.”
다음순간 정하의 입에서 떨어진 말이 화살처럼 키류의 귀에 꽂혔다.
“바로 하나기리가 쓰는 풍신일도류니까.”
“뭐라고요? 풍신일도류!”
키류의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풍신일도류라면 알고 있는 사람은 오로지 창시한 하나기리 자신밖에 없다는 검법이다. 그걸 어떻게 정하가 알고 있단 말인가.
“질문은 허용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이걸 보여주는 것도 지금뿐이에요. 머릿속에 단단히 넣고 있도록 해요.”
정하는 미즈류를 살짝 치켜들었다.
“풍신일도류 제일식(第一式) 미풍산화(微風散花).”
기술 이름을 말한 정하는 앞으로 한발을 내딛었다. 이어서 그녀의 몸이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갔다. 가속을 받은 몸으로 다시 상체를 숙인 정하는 거의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빠르기로 검을 뽑았다. 발도술이었다. 발도된 미즈류는 수평으로 날을 향하며 곧바로 앞을 향해 날았다. 상대의 허리를 둘로 가르는 일격이었다.
“약한 바람이 꽃을 흩날리고, 나의 마음이 상대의 몸을 가른다.”
정하는 그 뒤에 하나의 해설을 붙였다. 아마도 이 기술이 가진 의미와 쓰임새를 말하는 것 같았다.
“제이식(第二式) 순풍비조(順風飛鳥)!”
정하는 크게 외치며 뽑은 미즈류를 크게 치켜들었다. 미즈류의 검에 아침의 밝은 햇살이 배어드는 순간 정하는 갈 지(之)자를 그리며 번개같이 내리쳤다. 그 하나의 동작 속에는 4번의 베기 동작이 숨어있었다.
“바람을 탄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검날이 피를 뿌리며 뛰어다닌다.”
엄청난 속도와 변화. 키류는 정하의 달라진 눈빛과 함께 미즈류로 보여주는 검술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이런 검술은 키류가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다음은 제삼식(第三式) 난한양류파(煖寒兩流波).”
정하는 미즈류를 아래로 내리며 자세를 취했다. 이어서 그녀는 ‘얍!’하는 기합을 발하며 검을 아래에서 위로 끌어올리듯 당겼다가 다시 내리쳤다.
“부드럽고 따뜻한 바람과 강하고 차가운 바람이 양쪽에서 흐름을 이룬다.”
이어서 계속 정하는 풍신일도류를 시연했다. 하지만 겨우 몇 개를 했음에도 벌서 그녀는 숨을 헐떡거렸다. 단지 보이는 것뿐임에도 너무도 많은 체력을 써버린 듯 했다. 제오식까지 끝냈을 때 키류는 그녀를 막았다.
“잠깐만요!”
“왜 그러죠?”
“잠시 쉬었다 하죠.”
정하가 펼친 동작을 자세한 부분까지 하나하나 외우는 건 상당히 힘들었다. 물론 아무런 기반도 없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검술이란 틀 안에서 외우는 터라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어째서 그런 훌륭한 검술을 가지고 있으면서 직접 싸워서 하나기리를 베지 않는 거죠? 그를 저주한다고 하면서 싸울 생각은 없나요?”
질문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말을 들었으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키류는 정하의 솜씨에 이미 감탄을 넘어 존경심마저 가지게 됐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지금 보고 있는 대로예요.”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있는 정하가 대답했다.
“풍신일도류는 엄청난 집중력과 체력을 소모시키니까요. 겨우 다섯 개 정도를 펼친 정도로 이렇게 지치는 내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어요. 나는 그저…….“
정하의 손에 들려있던 미즈류가 힘이 풀린 팔과 함께 아래로 내려갔다.
“풍신일도류를 알고 있을 뿐이에요. 이걸 터득했다고는 볼 수 없으니까요. 터득하는 건 아마도 키류의 몫이 되겠죠.”
“과연 내가 이걸 터득할 수 있을까요?”
“복수를 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요? 앞으로 몇 년이고 끊임없이 그 일념으로 익힌다면 못할 건 없겠지요. 소원이라고까지 말했는데 그 정도를 못하지는 않겠죠?”
정하는 약간 숨을 고르며 흩어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어깨까지 오는 검은머리가 찰랑이며 뒤로 넘어갔다.
휴식이 끝나고 다시 검술 시연에 들어갔다.
“풍신일도류(風神一刀流)…… 제육식 유풍투망(遊風透網).”
기운을 차린 정하의 검이 날카롭게 허공을 날았다. 미즈류는 뱀처럼 미끄럽게 검집을 빠져나와 수평으로 꿈틀거리며 휘둘러졌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어진 검날은 그렇지만 뭔가에 막힌 듯 정지했다. 그리고는 다시 반동을 이용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베어갔다. 또 한번 막히자 이번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방향으로 바꾸며 쉬지 않고 공격을 가했다.
“희롱하는 듯 가느다란 바람이 방향을 바꾸며 촘촘한 그물을 지나간다.”
계속해서 동작들이 펼쳐졌다. 키류는 정하가 하는 동작의 뜻을 조금씩 알 수 있게 되었다.
정하의 춤추는 듯한 동작에 어느 새 주위에 있던 낙엽들이 휘말려 가며 바람을 이루었다. 그녀는 몸을 숙이며 상대의 가슴아래에서 솟구치며 찌르고 다시 수평으로 베는 연속공격을 펼쳤다. 제칠식 질풍노도(疾風怒濤)였다. 이때 아래에 있던 낙엽들이 일제히 하늘로 솟았다.
그것이 서서히 바람을 타며 아래로 내려올 즈음 정하는 다음 동작을 폈다. 검을 아래로 수직으로 베고는 다시 올려 긋는 풍신일도류의 제팔식 창룡강림(蒼龍降臨)이었다. 그러자 지면에 막 닿으려 하던 낙엽이 미즈류와 정하의 몸을 따라 우수수 흘러갔다. 정하는 마치 바람과 한몸이 된 것처럼 움직였다. 검을 펼쳐 적을 찌르고 피하는 그 순간만은 그녀의 몸과 미즈류와 바람과 낙엽이 모두 한 몸이 된 것만 같았다.
“이것이…… 풍신일도류…….“
키류는 그 아름다움에 취해 그만 스스로가 무엇을 하고 있는 지조차 잊었다. 기억나는 것은 오로지 정하와 미즈류가 만들어내는 동작의 완만한 곡선과 날카로운 직선뿐이었다.
“자, 이렇게 풍신일도류는 8개의 주요동작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이 동작을 제대로 이해하고 익힌다면 아마도 키류는…….“
동작을 모두 마친 정하의 몸에서 이윽고 바람이 사라졌다. 동시에 낙엽도 모두 떨어져 땅바닥에 놓였다. 그러나 그녀가 남기는 말이 마지막으로 키류의 마음을 흔들었다.
“하나기리를 벨 수도 있을 거예요.”
그랬다. 처음 아버지의 죽음을 들었을 때 꿈꾸었던 복수가 이제 현실에서의 가능성으로 다가온 것이다. 키류는 모든 것이 자기를 그리로 이끌고 있음을 알았다. 하늘의 운명이라고 해야했다.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키류는 단 한번 정하에게 높임말을 쓰며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을 다 보여준 그녀에게 남은 것이 떠나감 밖에 없다는 걸 알았기에 기꺼이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키류는 어째서냐고 묻지 않았다. 어째서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말 같은 걸 했으며 어째서 아무런 대가도 없이 자기에게 검을 가르쳐 주었냐고 묻지 않았다. 더불어 과연 어째서 하나기리를 그토록 미워하느냐는 의문조차도 가슴속에 묻어두었다.
정하는 그날 저녁 떠났다. 올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샤미센과 꽃바구니를 곱게 든 모습이었다. 키류는 그녀의 모습이 아주 멀리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계속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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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병도 -

* 안병도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4-07-17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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